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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철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저널정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 불교학보 제81집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223 - 247 (25page)
DOI
10.18587/bh.2017.12.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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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 조선과 일본의 갈등은 남부지방을 침략하는 왜구문제였다. 고려 말부터는 남해안뿐만 아니라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왜구들이 공물 운반선을 약탈했다. 끊임없는 왜구의 침탈과 살육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조선은 일본이 왜구의 노략질을 통제해 달라며 매년 세사미(歲賜米)를 대마도에 주고, 삼포(三浦)를 열어 교역을 허가하고 서로 사신을 보내는 등 일본과 강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조선무역이 끊어지자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대마번(對馬藩)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국내정치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명 ․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필요로 하였기에, 가또 기요마사(德川家康)와 소 요시토시의 조선강화교섭을 한층 본격화했다. 조선은 임시방편으로 일본의 거센 강화요청을 무마하고자, 정식 사신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국서(國書)를 주지도 않고 사명대사를 일본에 보냈다. 유정은 조 ․ 일 두 나라의 갈등을 인식하고 원인을 알고 있었고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두 나라의 이익을 증대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유정과 이에야스의 회담으로 조선에서 일본과의 강화가 허락되고 1607년에는 이에야스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끌려간 동포들을 쇄환하기 위한 사신을 보내면서 조선통신사로 이어졌다. 유정의 渡日 이후 260년간 동북아시아가 한차례의 전쟁과 분쟁이 없이 안정과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유정이 개척한 조선통신사외교의 최대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유정은 수행자로서 조선 ․ 일본의 갈등을 오직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자비심을 실천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했다.

목차

〈한글요약〉
Ⅰ. 들어가는 말
Ⅱ. 조선과 일본의 갈등
Ⅲ. 유정의 도일 과정
Ⅳ. 유정의 조·일 갈등 치유
Ⅴ.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s〉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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