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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기문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74집
발행연도
2019.3
수록면
37 - 77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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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 경산부의 성립과 변천을 고을의 공간구성과 운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경산부는 후삼국 쟁패기 동남지역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전략적 요충이었다. 고려시기에는 이총언의 태조를 돕는 선택에 따라 940년 군현 명호 개정시에 京山府의 읍격을 가졌다. 성종대 군사적 성격의 都團練使로 바뀌었다. 현종대 15개 속현과 읍치 가까이 4개 부곡을 거느리고, 경산부도의 여러 역과 그리고 원, 진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통, 군사적 거점지로서 京山府가 되었다.
읍치는 현 성주군일대였다. 고을의 운영은 경산부사와 속관, 호장층이 중심이었다. 수령은 외관청에서 송사 처리와 호장 거망, 감찰, 향교 관리 등을 주로 맡았다. 호장층은 읍사에서 일반행정과 주민 결속 의례를 자복사, 신사를 통해 주도하였다. 향리층은 기인과 향공을 배출하여 상경종사하였다. 재지세력의 무덤 공간은 읍치의 동남 일대로 보이고 그 뒤의 성산이 입보성으로 생각되었다.
경산부의 속현들은 인종대부터 주현화가 진행되어 고려말에는 3개의 속현만 남았다. 무신집권기 농민항쟁기와 몽고와 항전기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원간섭기 충렬왕과 충선왕대에는 公主府의 탕목읍으로 되었다. 이에 따라 재지 호장층의 위세가 높았다. 흥안도호부, 성주목으로 승격되어 계수관이 되기도 하였다. 우왕대에는 왜구가 낙동강 수계를 이용하여 경산부에 두 차례나 침입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경산부의 성립과 위상
3. 경산부 읍치의 구성과 운영
4. 경산부의 변천
5. 맺음말
참고문헌
외국어초록(Foreign language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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