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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연구원 불교연구 불교연구 제49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59 - 29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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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기의 시작으로서 메이지유신은 불교계로서는 불교박해의 암울한 시기의 출발이었다. 이러한 불교박해의 광풍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하여 새로운 종교담당기관으로서 교부성이 설치되는 1872년(明治5)경에는 그 기세가 꺾이지만, 교부성이 폐지되는 1877년(明治10)까지는 불교계로서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교계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교계에 던져진 중요한 과제가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심는 일과 기독교 교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응하는 일은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서양 제국으로부터 문물을 수용해야할 상황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독교와의 논쟁을 불교계는 충분히 감내하여 다수의 기독교비판서 즉 배야서를 출간하였다. 아마도 근대기에 걸쳐 일본불교계 만큼 배야서를 간행하여 기독교비판에 임한 나라는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배야서가 간행되는 중에 단순히 기독교비판만이 아니라 불교교리의 우수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노우에 엔료이다. 그가 󰡔진리금침초편󰡕에서 보여준 불교교리의 치밀하고 상세한 논의는 당시 불교계의 많은 사람들을 자극해 불교의 활기를 넣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엔료의 역할과 관련하여 근대기에 불교계가 기독교비판에 앞장선 이유와 그러한 비판이 가능했던 사회적 분위기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1) 불교계는 근대기 불교박해 기간 중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보다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서 기독교비판에 앞장섰다. (2) 불교계의 기독교비판은 탄압을 받고 있던 불교계로 하여금 교리에 대한 재이해, 재발견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3) 불교계는 기독교비판과 불교박해의 극복을 통해 전통적인 종교문화로서 장식불교의 전통은 근대에서도 유지되었다. (4) 불교계의 기독교비판은 다신론적인 신도의 위상을 유일신의 기독교로부터 지키는 의미가 되어 자연스레 신도국교화의 정책을 취한 메이지 정부의 방침을 옹호해주게 되었고, 메이지정부도 그러한 불교계의 비판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5) 불교의 교리가 기독교비판 등으로 서양종교에 대등하게 논쟁하는 점은 후에 일본사회에서 불교가 사회적 이념으로 정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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