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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66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31 - 170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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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초기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세력에 대해서는 그간 상당한 성과가 쌓여, 전반의 흐름을 정리한 것뿐만 아니라 개별 정당이나 정파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주로 비중이 큰 인물에 대한 개별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밖에 수많은 다양한 인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넓히면서 연구를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최익한도 그러한 연구 대상에 충분히 포함되는 인물이다. 최익한은 1920년대부터 ML파, 이른바 3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인물이었으나 구속과 오랜 수감기간 뒤 집필활동으로 생활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최익한은 곧바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처음에는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를 조직했으나 통합의 필요성에 따라 장안파 공산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경성지구위원회를 조직하여 당내 세력을 형성하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공산당이 결성되면서 양자 간에 주도권 다툼을 벌였을 때, 최익한은 이영, 정백과 더불어 장안파의 삼두마차였다고 할 수 있다. 이영과 정백이 상대적으로 온건파였고, 소극적이었던 입장인 데 비해 최익한은 가장 적극적으로 맞섰다. 뛰어난 이론가이면서 그 자신도 당내에서 일정하게 세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장안파는 재건파에 밀려 결국 해체하고 말았다. 재건파가 일제 말기에 활동을 계속했다는 점 때문에 조직이나 재력이 크게 우월하여 맞서기 어려웠다. 재건파는 공산당을 장악하고 나서 분파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장안파 출신, 특히 가장 강렬하게 맞섰던 최익한은 간부에 들지 못하였다. 재건된 조공 내에서 중앙에 맞서 대회파가 반기를 들었을 때도 최익한은 여기에 합류하였다. 조공, 인민당, 신민당의 3당합당 과정에서 조공 중앙파에 맞서 사로당이 만들어졌을 때, 최익한은 이에 참여했고, 그 뒤 다시 이들을 중심으로 근민당이 결성되었을 때도 참여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익한은 장안파, 대회파, 사로당, 근민당 등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셈이다. 최익한은 국가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반팟쇼투쟁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단체를 통해 활동하였다. 특히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강령을 작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관련하여 일제 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변명하는 ‘변백장’을 작성하여 자신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통일전선에 친일세력이 참여하는 것을 비판하는 상황에서 일제 말기 그가 마치 전향했던 것처럼 비판하는 세력에 대해 자신에 대한 변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익한은 미소공위와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으나 당시의 상황은 단독선거 실시와 단독정부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최익한은 근민당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그 뒤 계속 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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