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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53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35 - 176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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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중·후기 介坪里의 역사 변천을 일두 정여창과 사회·경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먼저 개평리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정여창의 증조부 정지의, 조부 정복주, 아버지 정육을의 행력을 고증하여 가전 자료의 오류나 윤색 부분을 구명하였다. 정여창의 행력은 조카 정희삼이 행장으로 정리하였으나 1550년의 시점에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552년에 개암 강익이 주도한 사우 창건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1570년 5월에 이르러 정여창에 대한 국가의 포증은대체로 마무리 되었다. 이와 함께 정수민이 수집하여 정구를 통해 찬집한 『文獻 實紀』는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정여창의 위상 정립과 제고의 근거였다는점에서 개평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山郡인 함양도 1662년(현종 3)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개평리의 상민들은호세로서 대동세를 포목으로 납부하였다. 개평리의 사족과 상민들은 17세기 중엽의 庚辛大飢饉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 1728년 정희량 사건에 의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불안정한 형편에 처하였다. 더구나 18세기 중엽 이후 환곡의 폐단은 개평리를 비롯한 함양지역 상민들의 삶을 매우 열악한 상태로 밀어 넣었다. 대체로 1790년대를 기점으로 극심한 환곡의 폐단에서 벗어났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田稅木價로 인한 농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개평리에 위치하였던 北倉, 場市, 介坪店 등은 조선 후기 개평리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며, 육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지역 내 거점의 증거이다. 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설의 介坪店이 생겨나고 운영되었다. 개평 장시는 조선 후기 5·10일장으로 개평리가 주변 마을과의 관계에서 사회·경제·문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으며, 개평리 사족과 상민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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