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0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285 - 319 (3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守國寺는 1900년 현 위치에 세워졌지만 세조 조부터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전통사찰이다. 그러나 현재 경내에는 이를 입증할 만한 불전은 한 동도 남아 있지 않다. 현 위치에 들어설 당시 세워졌던 大雄殿과 大房 등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존재했지만 1988년 입안된 ‘봉산자연공원 계획안’에 따라 1990년대 중반 들어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을 통해 수국사의 역사적 추이를 살펴본 결과, 수국사가 조선전기 창건된 正因寺의 後身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오릉의 능침사찰 역할을 조선 전기에는 정인사가, 조선후기 들어서는 수국사가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인사에서 수국사로 寺名이 바뀌는 뚜렷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서오릉이 조선왕실의 陵地로 자리매김 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대의 의경세자 능인 경릉이 조성되면서 부터인데, 이 때 능침수호사찰로 정인사가 창건된 것이다. 예종의 死後 그의 능인 창릉이 인근에 조성되자 정인사는 크게 중창되면서 경릉과 창릉의 능침수호사찰이 되었다. 이후 정인사는 명실상부한 왕실원찰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유생들에게 있어서는 도성에서 가까운 독서처로 인식되어 출입이 잦았던 곳임을 당시 활약한 유학자들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들어서면 17세기까지는 정인사라는 이름의 기록이 보이지만 18세기 들어서면 서오능 인근 사찰로 수국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이능화선생이 “정인사는 뒤에 수국사가 되었다”고 한 조선불교통사의 내용을 확인하면서, 조선전기 정인사의 역할을 조선후기 들어 수국사가 계승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람배치에 대해서는 조선전기와 조선말기로 나눈 후, 조선전기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추론했다. 하나는 김수온이 쓴 「正因寺重創記」 를 통해 동 시기 능침사찰인 봉선사와 유사한 조선전기의 일반적인 능침사찰 배치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엄대사 설준이 설계를 맡았다는 것을 감안하여 당대의 화엄계 사찰인 원각사의 배치를통해 추론해 본 것이다. 능침사찰로서의 배치와 화엄계사찰로서의 배치는 주불전의 명칭과 탑의 유무로 달라질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중심축을 따라 좌우대칭으로 건물이 배치된다는 점이 같아 보인다. 따라서 중창당시 정인사의 119칸 당우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고 탑은 노사신의 시를 통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조선후기 수국사의 가람배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고, 조선말기는 1900년 건립당시 지어진 불전의 이름과 당시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통해 추론해 보았다. 주불전 맞은편에 대방이 배치되는, 19세기 말 서울경기지역에 성행했던 배치형식이 수국사에도 적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수국사는 억불의 조선사회에서 왕실에 의해 개창되어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浮沈은 겪었지만 조선왕실의 지원과 관심 속에 존재했던 서울경기지역 사찰의 존재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4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