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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효경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비교민속학회 비교민속학 比較民俗學 第70輯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61 - 94 (34page)
DOI
10.38078/ACF.2019.12.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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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것으로 먹는 패류이다. 이매패강 굴과의 조개류로, 해안의 가장 바깥쪽에서 서식하므로 손쉽게 구득이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출토된 패류의 70% 이상이 굴껍질로 다른 어패류에 비해 취식 비율이 높다.
이러한 굴은 석화(石花) · 석화(石華) · 여방(蠣房) · 모려(牡蠣) · 여합(蠣蛤) · 모합(牡蛤) · 고분(古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주로 사용된 용어는 석화(石花)이다. 여방, 모려, 모합 등이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되는 용어였던데 반해 석화는 조선시대 전 시기동안 사용된 대표 용어이다. 석화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로 자연물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조선식 용어라 하겠다.
일찍부터 섭취하기는 했으나 보관과 운송이 용이하지 않았기에 굴은 연산군대까지는 임금에게 아첨하는 호미(狐媚)로 비견되었다. 왕에게 아첨이 가능할 정도였다는 사실은 굴이 매우 귀했음을 의미한다. 운송의 어려움이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왕실에는 매월 생석화를 진공하였는데, 경영에서 책임 맡았다. 운반 도중 변질되므로 거리상 가까운 경영에서 진공한 것이다. 민간과 달리 굴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은 왕실에서는 생석화를 이용해 석화탕, 석화채 등의 요리와 젓갈 등으로 즐겼다. 굴젓은 당시 쌀 3되, 팥 1말과 맞먹는 가격으로, 조선시대에 성인 1일이 하루에 두 끼를 먹을 경우 한 되를 먹으므로, 굴젓 1말은 성인 1명의 3일치 식량과 맞먹는다. 다른 젓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였지만 다른 물품에 비해 저렴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어패류에 비해 채집이 용이하기 때문에 가격은 저렴하였지만 그 약리적인 효험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민간에서 굴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볼 수 있다. 물론 해안가에서는 백성들의 자생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는 했으나 운반이 용이하지 않아 16세기 조리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반면에 17세기 중엽 이후의 여러 기록들에서 생굴을 사용한 굴요리가 다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굴의 식용이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생굴을 이용한 굴회, 굴냉채, 굴김치, 굴죽 등의 굴을 재료로 한 요리가 등장한다.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어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어패류 활용이 가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굴은 바닷가에서는 흔한 식재료였지만 보관과 운송이 용이하지 않고, 영양이 풍부하여 귀한 재료로 인식되었다. 상품경제가 발달되면서 굴젓은 즐겨먹는 기호식품이 되었기에 이와 관련한 식사예절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굴의 명칭과 종류
Ⅲ. 조선시대 이전의 굴 활용
Ⅳ. 조선시대 굴 생산과 활용
Ⅴ.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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