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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저널정보
비교민속학회 비교민속학 比較民俗學 第70輯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199 - 240 (42page)
DOI
10.38078/ACF.2019.12.7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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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음식을 대표하는 두부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北宋의 陶穀(903~970)이 쓴 『淸異錄』에 나타난 두부의 기록은 문헌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 두부가 전래된 시기는 고려 말이다. 이색의 『목은집』에 따르면, 1365년(공민왕 14)에 과거를 치룬 뒤 두부를 먹었다는 기록이 처음 확인된다. 그 뒤 두부는 육식을 금하던 사찰에서 주로 만들어졌고, 이는 왕실과 민가로 퍼져 나가는 배경이 되었다. 그 결과 ‘절’하면 으레 두부를 만드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豆泡’ 또는 ‘泡’라고 불렀다. 사찰을 16세기 이후 造泡寺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조포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왕조는 종래 ‘능침사’ 외에 ‘능침조포사’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사찰이 국가 관리아래 놓인 국역의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조포사에게 능침 제향의 부담과 수호, 그리고 산림보호를 맡기는 대신, 그 외에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왕실의 보호가 약해진 상황에서, 사찰에 부과된 각종 국역과 과도한 僧役은 일반 사찰은 물론 조포사의 피폐와 몰락의 주요한 원인으로 대두되었다.
18세기 말 정조는 능침 수호와 관리를 위한 사찰 개혁의 일환으로 조포사 정비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각지의 사찰들은 스스로 조포사에 속하려고 하였다. 능침을 수호하는 조포사에 소속됨으로써, 중앙이나 지방의 과도한 부세 부담을 줄이고 수탈을 막고자 한 것이다. 조포사 屬寺의 잇따른 출현은 단순히 왕릉 관리를 위해 국가가 사찰을 늘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사찰의 부담을 경감 시키려는 지방 사찰 스스로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조선후기 조포사의 등장은 公으로의 전화이라는 과제가 실린 사찰 정비의 일환이자 능침의 수호와 관리를 통해 왕실 권위를 회복하려는 18세기 개혁정치의 산물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려 말 두부의 전래과정
Ⅲ. 조선전기 豆泡의 보급과 조포사 출현
Ⅳ. 조선후기 진관사와 조포사의 정비
Ⅴ. 진관사 두부와 그 실제
Ⅵ.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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