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지희 (서울역사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39號
발행연도
2020.2
수록면
243 - 270 (28page)
DOI
10.14769/jkaahe.2020.02.39.243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대한제국기 및 일제강점기 왕실문장은 李花紋, 雲峴宮紋, 寺洞宮紋이 있다. 이화문은 대한제국기 國文에서 비롯되었고, 운현궁문과 사동궁문은 일제강점기 이화문이 국가의 상징에서 왕실의 상징으로 위상이 축소될 때 일본 천황가로부터 公家로 인정을 받은 운현궁과 사동궁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다.
이화문은 그동안 단판 3꽃술형이 정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이화문을 고찰한 결과 종류가 약 10여 종에 이르며, 같은 물품이라도 여러 종류의 이화문이 사용되고 있었다. 대한제국기 이화문은 아직 형태가 정형화되지 않았으며 여러 종류의 이화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기 이화문의 특징은 다양성과 복합성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화문은 점차 단판 3꽃술형으로 정착되었다. 천황가와 황족의 문장을 구별하여 사용하던 일본의 영향으로 일본 황족의 일부가 된 조선 왕실에서도 단판 3꽃술형 이화문을 왕실 문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단판 3꽃술형 이화문은 창덕궁 건축과 실내의장뿐만 아니라 왕실용품과 공예품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일제강점기에 이화문의 대표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화문은 국화문과는 달리 개인적 목적과 상업적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다. 한일강제병합시 왕공족의 개념과 세부규정을 두지 않았던 일본의 조선 왕실에 대한 차별적 정치의도가 이화문에도 작용되었다.
운현궁문과 사동궁문은 공족으로 인정된 李熹와 李堈, 즉 운현궁과 사동궁에서 사용한 궁가문이다. 궁가문은 공위 부여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운현궁문과 사동궁문은 일제강점기에 와서 등장하였다. 운현궁문은 단판 3꽃술형 이화문에 원권이 둘러진 형태이고, 사동궁문은 복판 3꽃술형 이화문과 형태가 같다. 복판 3꽃술형 이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왕실문장에서 사동궁문으로 전환되었다.
운현궁문과 사동궁문은 이화문과 유사한 형태 때문에 그동안 이화문과 구별되지 않은 채 이화문으로 오인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운현궁 양관의 지붕장식, 여러 석조물과 생활용품의 운현궁문과 사동궁문의 존재와 출현배경이 확인된 만큼 이화문, 운현궁문, 사동궁문 각 문장에 대한 구분과 이해가 필요하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대한제국기 이화문과 다양성
Ⅲ. 일제강점기 이화문의 변화
Ⅳ. 일제강점기 궁가문의 등장 : 운현궁문과 사동궁문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0-374-000346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