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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걸순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94輯
발행연도
2020.4
수록면
35 - 6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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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당시 대전에서는 3월 16일의 유성장터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일까지 군내에서 8회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전의 3․1운동은 현상적 사실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부정확한 전문과 사실이 혼재되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전지역은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 조직이 강하지 않았고, 민족대표와 직접 연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기 계획단계에 참여한 지역 출신 학생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 조직을 통한 독립선언서 배포계선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전은 교통의 요지임에도 독립선언서 지방 배포 담당자들이 단순 경유하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는 만세시위 촉발의 주요 동인이 되어 산내면 출신 서울 유학생 김정철은 독립선언서 등 문서를 지니고 귀향하여 인동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상수와 이권수는 중앙 지도체와 연계하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유성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시위는 유성장터와 인동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전개되었다. 장터에서는 장날이 아닌 날 전개되는 경우도 있었다. 3월 27일 인동장터 시위는 시장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으나, 유성장터처럼 인근 지역 주민이 몰려와 전개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장터 시위치고 그리 큰 규모는 아니어서, 많을 경우는 200~400명 규모였고, 대개 수십 명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시위 양상은 격렬하였다. 유성과 인동장터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어 일제측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였고,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가수원에서는 일제와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 산위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치는 이른바 봉화만세운동도 전개되었다. 대전 3·1운동 주도자 김정철과 홍병두는 3․1운동 참여자의 이후 독립운동 추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목차

「국문 초록」
Ⅰ. 머리말
Ⅱ. 민심의 동향과 독립선언서의 전달
Ⅲ. 만세시위의 전개
Ⅳ. 만세시위의 성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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