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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성주현 (청암대학교)
저널정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숭실사학 제40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87 - 21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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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전주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전주의 3·1운동은 3월 12일 첫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3월 23일까지 수차례 지속되었다. 이들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뿐만 아니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등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이외에도 기생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전주 3·1운동에서 50여 명이 일경에 피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산에 있는 조선군사령부에서 1개 중대병력을 파견할 정도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전주지역 3·1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만세시위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전주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3월 1일이었다. 그리고 3월 2일 밤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전주 시내를 비롯하여 상관면 등 외곡지역에까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지만, 실제 만세시위가 전개된 것은 10여 일 후인 3월 12일이었다. 이후 3월 말경까지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둘째는 만세시위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배포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3월 12일 첫 만세시위는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개별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월 13일부터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대를 통해 보다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추진해나갔다. 셋째는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3·1운동의 3대 원칙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였다. 그럼에도 일부지역에서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등을 습격하거나 방화하는 양상의 폭력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전주지역의 만세시위는 비폭력 평화적으로 전개되었다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넷째는 만세시위를 학생과 천도교 및 기독교 등 종교인이 주도하였다 점이다. 전주의 만세시위 역시 천도교 전주교구를 중심으로 기독교와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는 3·1운동 이후 군자금 모금 등 지속적으로 민족운동과 연계되었다는 점이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으로 이어졌다. 한성정부를 비롯하여 다수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 임시정부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급하였다. 전주지역에서도 3·1운동 이후 1920년대 초까지 임시정부의 요원이라는 직으로 군자금 모금에 적극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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