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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을경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5집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5 - 4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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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집안의 관향은 밀양 박씨이다. 박인호 집안의 가계표를 살펴보면, 박인호와 박광호는 사촌지간이다. 박인호를 포함한 66대는 모두 동학교인이었고, 박인호의 아들인 67대도 모두 동학교인이었다. 또한 박광호 집안은 3대에 걸쳐 모두 교인이었다. 박인호의 두 며느리도 모두 교인이었다. 이처럼 박인호 집안은 4대에 걸쳐 모두 교인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박래원과 박래홍은 사촌지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 이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관계가 1920년대 민족운동에 함께 앞장서는 것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은 유대관계가 민족운동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박인호가 동학에 입도하게 된 계기는 귀천의 구별 없는 만민평등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동학의 가르침에 매료되어서였다. 박인호는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옹기장수를 가장하여 충남 일대를 중심으로 포덕활동을 펼쳤다. 특히 서산지역은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입도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박인호 이외에 집안의 다른 인물이 언제 동학게 입도하였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박인호의 동학 활동이 가족이라는 유대를 통해 전파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박인호가 교단의 지도자로 부상한 시기는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때부터였다. 이때 소수는 박인호의 사촌동생 박광호가 맡았고, 박인호는 봉소를 맡았다. 이후 박인호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었다. 덕의대접주 임명은 박인호가 동학의 주요 인사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박인호의 포교활동과 활동기반이 되는 내포지역에 동학 교세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박인호는 보은 장내리 시위운동 이후 덕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해안지대의 책임자가 되었다. 내포지역 전체가 박인호계열의 동학조직이었으며, 이들은 포덕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충청도 충의포는 박인호의 덕포와 박덕칠의 예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손병희가 북접의 통령직을 맡으면서 충의포는 박인호가 맡았다. 박인호를 포함한 북접 동학군은 최시형의 총동원령을 통해 9월 18일 봉기했다. 이후 10월 15일을 전후하여 박인호와 동학군은 해미와 아산지역에서 전투를 하였고, 10월 18일 면천 승전곡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사기가 진작된 동학군은 이후 아산에서 군기를 몰수하였고, 25일에는 예산군 고덕면의 구만포까지 진출했다. 이후 동학군은 경성으로 진격할 계획을 수정하여 홍주의 관군세력을 전멸시킨 후 경성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박인호 휘하 동학군은 결국 홍주성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로 희생된 3만 명의 동학군은 북접에게 치명적이었다. 이후 박인호는 새우젓 장사로 위장한 홍종식을 우연히 만나, 교인들을 독려하면서 동학재건활동을 시작하였다.
박인호는 손병희와 함께 동학 재건을 위해 먼저 충남지역을 선택하였다. 이윽고 1900년 손병희가 동학 대도주가 되면서 동학의 지도체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박인호는 손병희를 적극 지지하였고, 박인호는 경도주가 되어 교단의 조직 점검을 맡았다. 이에 따라 박인호는 전국을 돌면서 교인들의 상황을 살피고 격려하는 등 동학의 재건에 노력했다. 손병희는 박인호에게 보국안민운동을 계획할 것으로 지시하였고, 박인호는 두령들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하여 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진보회는 결국 일진회와 통합하였다.
진보회와 통합한 일진회가 친일의 노선을 걷게 되자, 동학은 1905년 12월 1일을 기하여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재편하였다. 박인호는 1906년부터 교단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본격적인 교단 정비작업에 몰두하였다. 또한 자신이 맡은 충남지역의 포교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도주가 된 박인호는 본격적으로 교단을 개편하였고, 포교활동과 함께 교육문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지방에 교리강습소와 야합강습소를 설립하였고, 독자적으로 학교를 인계하여 운영하는 등 교육철학을 통해 교육사업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에서 박인호는 운동 자금 6만 5천원을 3번에 걸쳐 제공하였다. 이뿐 아니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선독립신문의 원고를 작성하였으며, 강계교구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한 모금운동도 지시하였다. 결국 그는 1년 8개월의 수감생활을 겪게 되었다. 이후 1926년 6·10만세운동을 통해 박래원이 부각되었다.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박래원 등은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계획하였다. 박래원은 천도교측의 동원, 지방연락과 격고문의 인쇄 작업을 책임졌다. 박래홍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하는 등 박래원과 박래홍이 교단의 중요 역할을 했던 의미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때 박인호를 포함한 구파 지도자들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박래원을 통해 제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래홍이 교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는 박인호가 검거되는 등 교단이 최대의 위기를 맞는 1919년 이후였다. 박래홍은 교단 정비를 위해 청년교리강연부를 결성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청년동맹을 구성하여 주도적으로 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1920년대 중반 신간회 활동을 통해 신간회 발기인, 간사를 맡아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동학을 통한 항일운동
3. 천도교를 통한 민족운동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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