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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을경 ((재)충청남도역사문화원)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56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51 - 7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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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지역은 보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서 중요한 곳이다. 보은은 보은집회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며, 1893년 10월부터 약 1년 동안 최시형이 기거하면서 동학교인을 통솔한 곳이다. 옥천의 동학농민군들의 움직임은 1894년 3, 4월 경으로 짐작된다. 옥천을 포함한 충북지역 출신의 동학농민군들은 전라도 내려가 전봉준부대에 합류했던 것으로 보이며, 4월 중순 이후 대부분 해산하였다. 이 시기부터 옥천의 동학농민군은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들과 호응하면서 활동하였고, 최시형이 있던 청산리를 중심으로 동학교인들이 세력을 넓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첫 기포는 7월 18일에 크게 봉기하였다고 하나, 관련 활동상은 파악되지 않는다. 최시형은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고, 옥천의 박석규를 비롯하여 옥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접주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의 첫 활동은 10월 2일로 확인된다. 10월 19일을 즈음하여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중순에서 하순까지는 전봉준 부대와 손병희 부대가 공주에서 한다리 ‘한솔벌’ 전투를 시작으로 효포전투, 이인전투 등을 전개했다. 이때 옥천의 동학농민군들이 손병희 부대로 들어가 전투를 전개했고, 한편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 방면으로 이동하고 난 이후의 옥천 주변의 동학농민군들은 10월 중순부터 회덕, 연기, 청주 등지를 거쳐 옥천으로 집결하였다. 이들은 증약전투에 이어 11월 5일에는 청산 석성리에서, 11월 8일에는 문바위골에서 전투를 벌였고 피해가 컸다. 특히, 충북 남부지역에서 민보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의 탄압이 가장 성행했던 지역이 옥천이었다. 옥천지역에서 양반세력과 동학농민군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공주에 있던 전봉준 부대와 손병희 부대는 10월 말경 논산으로 내려갔고, 11월 6~7일경 다시 공주로 북상했다. 이들은 남북접이 연합하여 우금치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고, 결국 실패했다. 한편 11월 8일 옥천의 양산장에 동학군 몇 천명이 모여 관군과 접전을 벌였고, 50여명이 희생당했다. 11월경 동학군과 관군에게 옥천은 중요한 장소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옥천을 중심으로 일본군은 11월 9일 옥천에서 금산, 11월 16일 문의에서 옥천, 18일 옥천에서 영동, 아산 등으로 이동했다. 옥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의 피해도 극심했다. 11월 5일을 전후하여 옥천지역의 피해가 컸고, 11월 말경에서 12월 초에는 옥천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이 관군과 접전을 펼쳐 큰 피해를 입었다. 옥천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대표 인물은 박정빈, 김재빈, 김진오, 원준상, 육상필 등으로 파악된다. 이후 옥천 동학농민군들은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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