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귀한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저널정보
(사)한국문화유산협회 야외고고학 야외고고학 제39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73 - 92 (2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조선시대 국가 재정은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해 운용되었다. 16세기 왕실의 재정 수요는 연산군대부터 급증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는 연산군대에 제정된 신유공안(辛酉貢案)이 언급되고 있다. 신유공안은 성종대 지나치게 감소된 공액(貢額)을 현실적으로 증액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유공안의 핵심은 물품의 전용(轉用)·가정(加定) 조례(條例)에 있다. 신유년인1501년(연산군 7)은 공액이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16세기 왕실은 전용·가정을 악용하여 소비를 확장하였다. 그 결과,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경비가 입내(入內)와 내수사를 통해 왕실로 유입되었다. 신유공안이 제정된 이후 이루어진 감결(甘結)에 의한 입내,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에 확립된 내수사 직계제(直啓制)는 왕실의 소비를 더욱 촉진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관요 백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왕실은 사옹원의 국용(國用) 백자를 내용(內用)으로 전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자의 소유권이 변화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왕실 관련 명문을 그릇에 점각(點刻)하였다. 아울러횡간에 기재되지 않은 백자를 가정하여 수요를 충당하였다. 사옹원의 분원(分院)인 관요는기존의 별번에 새로이 가정된 백자까지 공급해야 했다. 이에 따라 별번(別燔)이 점차 강화되었고, 이는 1560년대에 ‘別’銘白磁가 제작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사옹원은 어부(御府)로 인식될 정도로 친왕실적인 관청이었다. 왕실은 감결을 통해 사옹원의 백자를 전용·가정하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백자에 대한 소비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