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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종원 (한밭대학교 인문교양학부)
저널정보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백제연구 제73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31 - 5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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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배경을 수촌리고분군 조영세력을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수촌리고분군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에 조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백제는 대내적으로 왕위계승 분쟁과 민심의 분열,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상황이 지속되었다. 백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왜를 비롯한 주변국가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각 지역에 존재하는 유력한 재지세력의 이탈 방지와 인적·물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각 지역에서는 위세품을 부장한 고분군이 조영되었는데, 수촌리고분군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수촌리고분군 조영세력은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가진 금강 중류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촌리세력은 웅진천도 이후 신진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백씨세력에 비정할 수 있다. 백제는 475년 10월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천도 배경은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한 한성의 함락과 개로왕의 죽음, 그리고 상존하는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웅진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전략적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로 및 내륙교통로의 요지라는 이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천도는 정치세력의 변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과정에서 다양한 귀족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주왕이 웅진을 왕도를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수촌리세력의 적극적인 협조와 중앙귀족세력들의 이해관계에서 수촌리세력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왕성이 수촌리세력의 재지기반이었던 의당지역이 아닌 공산성에 두어진 배경은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수로교통에 유리한 입지적 위치, 그리고 한성후기에 도사가 파견되어 행정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일정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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