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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나인호 (대구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독일사학회 독일연구 - 역사·사회·문화 독일연구 - 역사·사회·문화 제30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5 - 26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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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서양의 국민 및 민족개념이 1900년경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다룬다. 본 연구는 개념의 번역이란 번역자의 고유한 맥락에서 나온 고유한 생산물이므로 원래적인 의미의 변화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개념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진행된다. 서양의 민족 및 국민 개념의 수용사는 서양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과 맥을 같이한다. 중국·일본에서와 유사하게 한국에서도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들이 있었다. ‘부국강병’, ‘문명개화’의 슬로건 하에 한국의 엘리트들, 즉 개화파 지식인들은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근대국가 및 근대사회의 수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서양의 국민 및 민족개념은 이러한 맥락에서 수용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미 1860/70년대에 동아시아에서 영어의 'nation' 개념을 최초로 ‘國民’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people'과 'nation'을 ‘國民’으로, 또 'nation'을 ‘國家’로 번역하면서 서양의 근대 ‘민족/국민’ 개념과 흡사하게 ‘people', 'nation', 'state'를 동일시하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國民’ 개념이 일본의 미래국가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투쟁개념으로 사용되면서 1890년대가 되면 정치적 기본개념으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國民’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 후쿠자와의 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의 작품 『서양사정』을 모델로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조차 ‘國民’ 대신에 전통적 어휘인 ‘國人’을 사용하였다. 국민 개념을 지칭하기 위해 개화파는 전통적 어휘인 ‘인민’, ‘백성’, ‘동포’를 선호하였다. 물론 이러한 단어들은 개화파의 담론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이러한 단어들을 종래의 하층민, 피치자 등의 의미가 아닌 ‘모든 신분이나 계급, 통치자와 피치자’를 포괄하는 동등한 국가 구성원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특히 ‘동포’는 민족/국민 국성원의 평등과 형제애를 강조하는 은유로 빈번히 사용됨으로써 ‘民族’의 개념적 등가물로 기능하였다. 동시에 기존의 수동적 피지배민을 의미하던 ‘인민’, ‘동포’는 점차로 정치적 행동주체, 더 나아가 주권자의 의미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망 전야(1905-1910)에 가서야 ‘國民’ ‘民族’ 개념이 정치적 기본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1908년이 되면 그 빈도수에서 ‘국민’이 ‘인민’을 능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또한 빈번히 사용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미래국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국민’을 ‘신민’으로 동일시하려는 시도부터 개화파의 ‘인민’ 개념과 동의어로 사용하려는 시도, 나아가 ‘국민’을 서양의 국민/민족 개념의 의미에서 주권자로 이론화하려는 시도까지 다양한 의미론적 경쟁이 있었다. 또한 ‘국민’이 ‘민족’과의 밀접한 맥락 속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민족’이라는 -당시의 기준에서- 외래어는 독일의 ‘Nation' 개념, 즉 Kulturnation의 번역어이다. 동아시아에서의 독일 ’Nation' 개념의 수용에는 무엇보다 스위스 출신으로서 독일에서 활동한 국법학자 블룬츨리(Johann Caspar Bluntschli)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18세기 독일 계몽사상가들 이후 관행화되었던 영어 및 프랑스 어권의 정치적 'nation'과 독일어의 문화적 ‘Nation'의 엄격한 구별에 입각하여 'Volk'를 정치적 개념으로, 'Nation'을 문화적·에스닉적 개념으로 구별하였고, 'Nation'의 ’Volk'로의 변화를 ‘Nationalität’원리에 입각한 역사적 진보로서 환영하였다. 그의 사상은 일본의 카토 히로유키, 히라타 도수케, 중국의 량치차오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에서는 특히 신채호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1900년경이 되면 동아시아에서 'Volk'는 ‘국민’으로 'Nation'은 ‘민족’ 혹은 ‘족민’으로 번역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국민’, ‘동포’, ‘민족’을 밀접하게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써 근대 국민/민족 개념을 표현하였다. 이밖에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은 ‘민족’을 ‘국민’의 역사적·문화적 토대로 인식함으로써 양 개념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국민’은 일본제국의 ‘신민’을 의미하는 이데올로기적 강제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점차 인기를 잃어갔고, 반면 ‘민족’은 특히 삼일운동을 통해 대중적 개념으로 확산되어갔다. 1945년 이후 ‘민족’은 분단 상황에서 통일의 염원이 투영되면서 ‘하나의 후손’ 신화에 근거해 거의 인종개념으로 변화되었다. 한편 ‘국민’은 1945년 이후 남한에서는 다시 수용된 반면, 동의어로 쓰였던 ‘인민’은 금기시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에서는 ‘인민’이 사회주의적 의미내용을 지닌 채 정치적 기본개념으로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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