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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47집
발행연도
2022.3
수록면
389 - 42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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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대구지역의 낙론계 종장으로 활동했던 서찬규의 정체성 형성기(1845~1861)를 다룬 글이다. 서찬규는 강학 활동을 시작한 862년(철종 13, 38세)부터 졸한 1905년(고종 42, 81세)까지 약 44년 동안 632명의 문인을 양성하였다. 이는 퇴계학의 영향력이 강한 영남지역 내에서 율곡학이 이룩한 괄목할만한 성과이면서 낙중지역에서는 수위에 꼽히는 문세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한 동인은 물론 서찬규라는 인물이 지닌 영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찬규는 본격적으로 과거에 전념한 1세부터 학문에만 매진하며 강학 활동을 시작한 37세까지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 일기의 절필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객체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학문을 세워나가는 주체적 입장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일기가 기록된 시기는 서찬규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이자 추후 임재문파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19세기 대구지역 지식인의 존재양상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 서찬규의 정체성 형성기가 검토될 필요가 있다.
서찬규의 가문인 달성서씨는 7C 한강-여헌학파에서 8C 노론-호론계라는 가학 연원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조선학계를 주도하는 낙론학계로의 편입이 필요해지면서 대구서씨의 알선을 통해 서찬규는 낙론의 종장 홍직필의 문하에 종유하게 된다. 서찬규는 홍직필을 찾아가 차례의 강학에 참여하는데 이를 통해 낙론의 학문과 의리를 내면화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홍직필의 매산문파 및 범낙론계 지식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낙론학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이는 이후 낙론계 종장을 계승하게된 임헌회-전우의 인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가학 연원의 이원성
3. 서찬규의 학문과 정체성 형성
4. 정체성 형성기의 활동과 역할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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