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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용현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목간과문자 제29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159 - 186 (28page)
DOI
10.35302/wdis.2022.12.2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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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산시에 자리하는 압량국은 문헌으로는 2세기 초, 고고자료 분석에 의하면 3세기 말~ 4세기 초에 신라에 편입되었다. 새로 편제된 압량군은 下州 아래 속하였으며, 양서 신라전에 보이는 52邑勒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신라비석들에 보이는 신라의 지방 지배 상황으로 미뤄보면, 압량군에는 왕경 출신의 幢主와 道使들, 干支류의 외위를 가진 재지수장 村主들과, 幢主使人職의 인물들이 郡과 그 예하 村의 통치조직을 구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자료는 郡, 縣을 郡, 村으로 바꾸면 삼국시대로 그대로 소급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론이나, 압량군의 경우,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진량면 중 금호강 북안 즉 하양지역의 실태는 드러나지 않으며, 10세기 말 河州(이후 河陽)로 처음 등장한다. 소월리가 속한 현재의 瓦村面이 조선과 일제강점기의 지리지와 지명일람을 근거로 그 소속처를 영천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6세기 소월리 목간에 드러나는 지명의 범주는 대체로 1개 村의 범주로, 博沙川 남북 兩岸, 淸通川의 西岸, 琴湖江 北岸으로 진량과 마주하는 곳의 ⊃형 범주여서, 와촌면은 영천보다는 하양권이었으며, 당대는 押梁郡 예하였다고 보인다. 목간 출토지의 高床 건물지와 제의를 수행한 空地(廣場)는 해당 村 공동체의 정치,종교,사회와 재정의 공간이었다. 국가는 堤 축조 주도, 인력 동원, 所出 징수, 재지사회의 토착 의례에 간여, 村의 畓田 파악, 문서행정 적용 등을 통해 편제된 지역에 대한 국가 공권력의 영향력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고 있었다. 소월리 목간에 보이는 甘麻谷(甘末谷)은 인근 팔거산성 출토 목간에도 보이는 바, 6세기 말~7세기 초 소월리 지역 내에는 왕실 內省과 특수관계에 있던 마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산 임당동 고비는 서식·표기로 볼 때, 6세기 초의 것으로, 6세기 전반 신라의 敎令碑 계열의 행정명령비로 보인다. 경산 임당동 고비(이하 본고에서 “고비”로 약칭)의 발견 및 조영지 건물지는, 바로 주변에 위치한 干의 치소로 여겨지는 임당토성과 함께, 압량군 郡衙 행정의 중심적 배경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이는 통일신라시기 獐山郡의 모습으로 고착되기까지, 삼국시대 押梁郡은 여러 차레 국가에 의해서 그 영역과 소속이 통치와 행정적 목적에 따라 조정 재편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압량군의 편제와 신라 군현 경영
III. 압량군과 그 영역
IV. 경산 소월리 목간에 보이는 지역 양상과 신라의 지배
V. 경산 임당동 고비에 보이는 신라의 압량 경영
VI. 맺음말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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