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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갑동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63호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1 - 2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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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는 고려 현종 9년(1018)에 탄생하였다. 全州와 羅州가 중심이 된 도라는 뜻이다. 우선 전주는 통일신라시대 9주 중의 하나였고 후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후백제의 수도로 36년간이나 존속하였다. 후백제 멸망 후 안남도호부가 되었다가 전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현종의 몽진 기간 동안에 처음에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돌아올 때는 환대를 하였다. 이에 현종은 한편으로는 이 지역을 회유하면서 다시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현종 9년 지방제도 개편 시에 안남대도호부로 승격시켰고 전라도의 근간을 삼았던 것이다. 나주는 원래 군 단위의 행정 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주가 부상한 것은 후삼국 시기에 왕건을 통하여 궁예에게 귀부하면서부터였다. 그 과정에서 역할을 한 토착 세력이 나주 나씨 나총례란 인물이었다. 그는 궁예 밑에 있었던 왕건과 결탁하여 나주를 점령토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에 궁예는 왕건을 나주에 파견하였고 이 일대를 점령한 후 금성군에서 나주로 승격시켰다. 나주가 부상한 또 다른 이유는 왕건이 나주에서 나주 오씨 부인을 맞아온 때문이었다. 특히 나주 오씨 부인의 아들인 武가 태자로 책봉되고 태조의 뒤를 이어 혜종으로 즉위하였다. 혜종이 죽은 후에는 혜종에 대한 사당을 건립하고 그를 제사하기도 하였다. 나주가 또 한 번 고려 왕실과 밀착된 것은 거란의 침략으로 현종이 나주로 피난 가면서였다. 피난 지역으로 나주를 택한 것은 이 지역 세력이 태조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준 바 있으며 나주가 왕건의 후비 나주 오씨의 출신지일 뿐 아니라 혜종의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주 지역으로 가면 자신을 잘 보필하고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자신이 태조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10일간 머무르다 돌아간 현종이 자신에게 잘해준 나주민들을 잊지 못해 현종 9년(1018) 지방통치제도 개혁 시 전라도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전라도의 탄생과정은 고려의 지방 통치제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4년 후인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비교적 객관적인 지방통치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성종 대에 오면 고려 왕실과 지방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지방제도가 개혁되었다. 그리하여 종래 큰 고을이었던 광주가 강등되고 나주가 부상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1018) 후백제 수도였던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全羅道가 탄생하였다. 전라도 탄생의 의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고려의 지방통치제도인 5도 중에 전라도의 명칭이 가강 먼저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도의 명칭과 영역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전라도는 명칭과 영역 면에서 고려 전시기에 걸쳐 거의 변화가 없었고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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