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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45집
발행연도
2021.7
수록면
231 - 275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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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고종대에 이르는 동안 진찬의례進饌儀禮의 이래전移來錢 규모 가운데 군문의 재정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군문의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국왕의 내하전內下錢 비중이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우선 순조대인 1829년(순조29) 2월에 설행된 진찬의례에서는 호조와 내숙설소의 재정이 이래전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헌종대인 1848년(헌종14) 3월의 진찬의례에서는 총위영總衛營의 재정이 크게 활용된다. 헌종憲宗의 친위군인 총위영에서는 창설 직후 둔전을 경영하는 한편, 군수에 필요한 물력을 중앙의 다른 관청으로부터 빌려옴에 따라 재정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 결과 진찬의례를 설행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의 대부분을 총위영에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철종대 진찬의례에서는 군문의 역할을 확인할 수 없다. 1849년(헌종15)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哲宗이 즉위하면서 총위영이 혁파되는데, 친위군의 혁파는 진찬의례의 비용 마련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고종대에는 19세기에만 5차례의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다. 첫 번째로 1868년(고종5) 12월에 진찬의례가 설행되었는데, 운현궁雲峴宮의 돈이 총 이래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877년(고종14)에 이르면 다시 헌종대처럼 진찬의례에서 군문의 재정이 활용되기 시작한다. 고종高宗은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친위군인 무위소武衛所를 창설하고, 다른 군문과 관청으로부터 물력을 이급해왔다. 그 결과 무위소에서 진찬의례에 사용된 총 비용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마련할 수 있었다.
1887년(고종24) 1월의 진찬의례에서도 군문의 재정이 활용된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진찬의례에 들어가는 총 비용 가운데 고종의 내하전內下錢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군문의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1892년(고종29) 진찬의례의 이래전 규모에서도 군문의 재정이 아닌 고종의 내하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1893년(고종30) 10월의 진찬의례에서도 군문이 아닌 호조가 진찬의례를 주관하였던 것으로 봤을 때 군문의 이래전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각 관청과 군문이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고종의 내하전이 이를 보충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찬의례에 필요한 비용도 이전처럼 군문에서 대규모로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종의 내하전이 진찬의례의 전체 이래전 중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군문의 재정은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을 헤아려보면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이나 세자가 왕실 어른들의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군문 재정이나 내하전 등의 상당한 물력을 투입하여 주도적으로 진찬의례를 설행하였다. 즉 진찬의례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순조~헌종대 진찬의례와 군문의 재정 활용
3. 철종~고종대 전반 진찬의례와 군문의 재정 활용
4. 고종대 후반 진찬의례와 군문 재정 이획 비중 축소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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