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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LI FUSHI (고려대학교 국제한국언어문화연구소)
저널정보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국제한인문학연구 제1권 제1호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5 - 3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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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문화정책은 시기별(초기-1932~1936, 중기-1937~1940, 후기-1941~1945) 문화통치기구의 설립과 개혁에 따라 변화했다. 건국 초기 ‘만주국’은 식민정권의 정착과 안정을 도모할 목적으로 자정국 홍법처 및 정보처와 만일문화협회 등 문화통치기구의 설립을 통해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그 과정에서 보다 효과적인 선전을 위해 ‘만주국’은 각종 문화단체를 조직하고 신문의 문예란 개설을 활성화시켰다. 이는 일종의 회유책으로서 ‘만주국’ 초기의 활발한 문화 활동을 촉진했다. 한편 건국 초기는 행정제도가 확립되지 않았고 보도체제 또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통치기구의 침투력이 깊은 편은 아니었다. 건국 초기의 항일연극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배경 하에 등장하게 되었다. 진젠샤오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일부 애국청년들은 『대동보』와 같은 ‘만주국’ 기관지의 문예란을 통해 반제반봉건 성격의 희곡을 발표함은 물론 극단을 조직하여 민중(중국인) 계몽을 위한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국’의 문화 활동을 회유함과 동시에 반만항일세력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던 일본제국의 이중적 문화통치에 의해 항일연극 및 그 주체들은 곧 탄압되고 말았다. 중일전쟁 후, 일본제국은 식민정권을 한층 더 강화하고 대동아전쟁에 대비할 목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를 ‘만주국’ 최고 실권기구인 홍보처(초기의 정보처를 홍보처로 명칭 변경)의 직접적인 통치 기능으로 추가 ? 확대했다. 이에 따라 선전도구로서의 문화예술의 기능을 확대 · 강화함과 동시에 ‘만주국’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건설사업이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 ‘만주국’의 신극운동은 곧 그러한 문화건설사업의 일환으로서 전개되었다. 신극운동의 추진은 극단의 범람 및 극본공모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실질은 ‘만주국’ 당국의 연극선동정책에 의한 표면 현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만주국’의 독자적인 연극을 창조하기 위해 형식적인 측면에 치중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약화시키기도 했다. ‘만주국’ 후기에 들어와 고도로 집중된 중앙정권의 관제개혁이 이루어지고 『예문지도요강』이 반포되면서 ‘만주국’은 홍보처 중심의 일원적인 문화체제 및 결전문예체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전 시기의 신극운동은 연극보국이라는 결전문예운동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즉 신극운동을 강력한 선전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일본제국의 파시즘적 문화 성격이 전시상황의 심입과 더불어 노골화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연극보국운동은 증산, 개척, 헌금, 위문 등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도시 극단과 지방 극단, 이동연극 또는 연극경연대회 등 다양한 조직과 방식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멸망으로 연극보국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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