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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정빈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25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27 - 55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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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황해의 해적 張伯路를 중심으로 2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일면을 살펴보고, 그의 해상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111년 3월 부여는 후한의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고구려는 후한의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양국의 후한 공격은 상호 협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蘇子河 유역의 요동예맥은 고구려와 함께 참전하였고, 읍루는 부여를 지원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11년 3월 동북아시아의 각지에서는 反후한 세력이 급속히 확대된 양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해적 장백로가 주목된다. 장백로 세력은 지금 중국의 河北省ㆍ山東省 연안 연안에서 해상활동을 통해 성장하였고, 109~110년 산동반도와 그 주변을 세력범위에 두고 강성하였다. 독립적인왕국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110년 4월 후한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동반도를 떠나 요동반도남부를 향해 이동했지만, 111년 상반기까지 廟島群島ㆍ長山群島를 중심으로 하여 요동반도 남부-산동반도 동부를 공격하는 등 해상활동을 지속하였다. 이에 109년~111년 상반기 요동군ㆍ현도군ㆍ낙랑군 지역은 후한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차단되었다. 요동군의 군사력은 장백로 세력에대응하는 데 집중되었고, 현도군ㆍ낙랑군은 고립되었다. 111년 3월 부여ㆍ고구려의 낙랑군ㆍ현도군 공격은 장백로 세력의 해상활동을 배경으로 했다. 111년 윤4월 장백로 세력은 후한에 의해제압되었다. 후한의 요동군ㆍ현도군ㆍ낙랑군은 정비되었고, 부여와 고구려는 재차 후한과 우호관계를 수립하였다. 反후한 세력이었던 부여ㆍ고구려 등의 국제관계는 장백로 세력의 성쇠와 연동했다. 일찍부터 산동반도-요동반도-한반도 서북부 지역은 「묘도군도ㆍ장산군도 연안항로」를통해 연결되었는데, 한은 요동군에 이어 낙랑군을 설치하여 교섭과 교역의 무대를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묘도군도ㆍ장산군도 연안항로」는 보다 보편적인 해상 교통로로 구축ㆍ운용되었고, 일대는 상업과 어업 등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육지의 국가권력은 내륙의 농업 사회를 중심으로하였고, 섬과 연안의 민은 소외된 편이었다. 그 탈출구가 바다였다. 1~3세기 여러 해적은 국가권력의 이탈민으로 구성되었다. 해적의 바다는 육지의 국가권력에 상대한 독립적 세계의 하나였던것이다. 2세기 전반 장백로 세력도 그러하였는데, 2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까지 연동되었던 것은 「묘도군도ㆍ장산군도 연안항로」 일대의 성장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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