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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은진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87집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179 - 21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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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마자 일제 경찰은 전국의 경계를 강화했다. 4월 26일 임시 각의에서 순종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으며, 궁내성은 순종의 사망 일자를 하루 늦은 4월 26일로 이날 늦은 밤에야 정식 발표했다.
총독부는 순종의 국장을 고종의 국장보다는 간소하게 치르려고 했다. 한편 이왕직에 대한 비난이 비등했는데, 장례를 준비하며 준비 물품 관리를 소홀히 한 것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총독부에서 열린 국장위원회에서 국장일은 6월 10일로 정해졌는데, 일반적으로 조선 국왕의 장례는 5개월이 걸린 반면 일제하 순종의 장례는 47일로 그보다 훨씬 짧았다. 이는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하 이왕가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순종 국장과 5월 13일 조선박람회 개회에 대비해 국내 경계와 국경 경비를 매우 강화했다. 조선 주재 육군에서도 6월 9~11일 동안은 조선헌병사령부 안에 경비사령부를 두고 일부 군대를 배치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6월 6일경 천도교도 등의 6·10만세운동 준비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경찰은 대활동을 개시했다.
마침내 6월 10일 장례일이 되었다. 장례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당국의 간섭으로 신련 앞에 모실 명정을 내여 모시지 못하고 명정을 채여에 숨겨 모시는 등 문제가 있었다. 또 이왕직에서 실수로 유릉을 모시는 절차 중 가장 큰 제전을 빠뜨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6·10만세운동이 발발했다. 거의 장례 행렬이 출발한 때부터 지나는 길목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결국 국장일에 6·10만세 운동이 발발한 것은 중대 문제가 되어 일본 궁내성은 물론 내각과 총독부와 이왕직의 책임 문제가 거론되었다.

목차

1. 머리말
2. 순종 사망 후 국장과 능침 논의: 1926년 4월
3. 순종 장례 준비와 식민당국의 개입: 1926년 5월
4. 순종 국장의 거행과 6·10만세운동: 1926년 6월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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