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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11집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87 - 141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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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서원은 교육과 존현尊賢이라는 두 가지 기치 하에 출범하였지만 17세기 이후 사림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서원의 기능도 크게 확대 되어 갔다. 이 글은 조선시대 서원문화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또 가장 많은 서원을 보유하였던 영남지역 서원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검토한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17세기 초반인 광해군 연간에서 18세기 후반인 정조 연간에 이르는 조선후기가 중심을 이룬다.
먼저 사회적 성격으로는 17세기 이후 심화되었던 위차논쟁에 주목하였다. 위차논쟁은 단순히 예식상禮式上의 문제가 아니라 학통學統 내지는 도통道統의 전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써 논쟁도 그만큼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1620년 유성룡ㆍ김성일의 여강서원 합향논쟁은 원향체계와 학통의 상관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물론 ‘애동학서厓東鶴西’로 위차를 정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적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후일 전개되는 ‘병호시비 屛虎是非’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양인의 합향은 유성룡ㆍ김성일계가 조목계와 더불어 퇴계학파의 주요 문파門派의 하나로서 위상을 제고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리고 장현광의 임고서원 병배논쟁?配論爭은 여헌문인들의 극렬한 사문추양론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병향론의 명분으로 제시되었던 ‘불유사승론不由師承論’은 기존의 도통체계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남학파[퇴께ㆍ남명학파]의 학통을 퇴계ㆍ남명이라는 양대 구도 속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컸었는데, 임고서원 병배논쟁은 이와는 사뭇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후기 영남서원의 정치적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서인계 서원의 양적 증가와 기호학통의 확산이었다. 통상적으로 영남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세가 강했고, 학문적으로는 퇴계학파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인조~숙종조를 거치면서 상주ㆍ진주 등지를 중심으로 서인세가 크게 확산되었다. 영남내 서인계는 크게 서인 기호학파로서 영남으로 이거한 세력과 원래남인 퇴계학파로서 서인 기호학파로 정치ㆍ학문적 입장을 전향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영남내 서인 공론公論을 대변하며 남인계와 대립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치ㆍ사회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원우 건랩에 박차를 가했는데, 숙종 이후 영남지역에 이이ㆍ김장생ㆍ송시열ㆍ송준길 등 서인 기호학파의 거물들을 제향하는 서원이 상당수 건립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영조~정조 연간에 발생한 진주 종천서원 하홍도河弘度 출향黜享 사건은 영남지역에 친서인제[친노론계] 세력을 부식시켜 자파의 외원으로 삼고자 했던 노론들의 정략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매우 큰 사건이었다.

목차

요약문
1. 머리말
2. 원향론院享論을 통해 본 사회적 성격
3. 서남당쟁과 영남지역 서원의 정치적 성격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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