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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曺凡煥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29輯
발행연도
2010.12
수록면
5 - 3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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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신라 중대에 정치적으로 활동한 많은 여성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신목태후에 대하여 다룬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뿐만 아니라 성덕왕대 제작된 「황복사 금동사리함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신목태후는 신문왕이 첫 번째 왕비를 쫒아낸 후 새로 맞이한 왕비이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간 지 약 3년 만에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자 그녀의 정치적 위상도 더불어 높아졌다. 그리고 그 아들(효소왕)이 신문왕을 이어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런데 섭정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신목태후가 정권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신목태후는 효소왕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을 처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밀교세력에 대해서는 회유를 하였다. 또한 그녀는 신문왕대 폐지된 화랑도를 부활시켰으며 그것을 통하여 군사적인 후원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화랑도를 부활시킨 것은 효소왕이 성장하여 정국을 운영할 때 도움이 되는 세력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서시와 남시를 개설하였으며 당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결국 그 동안 소원했던 대당관계를 개선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이 결국은 반대세력의 반발을 크게 불러왔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목태후는 왕은 아니었지만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재위하는 동안 이루었던 치적을 능가하는 그러한 일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신목태후의 가계와 신문왕과 혼인
Ⅲ. 효소왕 초반기의 정치적 혼란과 신목태후
Ⅳ. 효소왕 후반기의 정치적 변화와 신목태후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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