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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민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발행연도
2010.12
수록면
37 - 7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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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애국지사 이만도의 일생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학문수학시기, 관직 활동시기, 항일투쟁시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단식 순국함으로써 역사 앞에서 무한 책임을 졌다.
이만도가 자진 순국을 선택한 것은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에 충실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향산은 조선 성리학의 종장인 퇴계이황의 후손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졌던 성리학 체계의 효용성과 가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일제침략은 이만도의 그러한 신뢰를 파괴한 것이고, 경술국치는 주자학 가치와 질서에 대한 종언이었던 셈이다. 곧 이만도의 의식의 내면에 있던 주자학적 가치와 질서는 경술국치로 인해 와해되고 수치와 오욕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만도의 단식 순국은 국치로 희망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던 출구였던 셈이다.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볼 때, 이만도의 단식 순국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 주자학의 종장인 퇴계의 직손이었다는 사실에서 조선의 정체를 상징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고, 나아가 중앙조정에서 십수 년간 요직을 지냈다는 점에서 비중이 큰 정통 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명실상부하게 이만도는 출신 가문의 전통과 권위, 그리고 축적된 관력 등 두 가지 면에서 대한제국을 상징할 만큼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상징성과 권위를 가진 그가 경술국치라는 민족적 치욕을 당한 역사현실에서 극단적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책임지기 위해 자결 순국했다는 사실은 후대에 생생한 역사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목차

1. 머리말
2. 가계와 수학
3. 出仕와 官歷
4. 은둔과 항일
5. 순국과 유훈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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