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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태용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민족문화 제35집
발행연도
2010.7
수록면
235 - 26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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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정조 15년 진산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그동안 진산사건은 천주교사의 맥락 속에서 주로 이해되었으나 정조 후반기 탕평 정국의 전개라는 맥락 속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바라볼 때 그 역사적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조 전반기 내내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노론과 소론의 공존은 재위 8년에 발생한 김하재 사건과 10년에 발생하였던 문효세자와 성빈의 죽음, 구선복의 옥사 등을 통해서 일정한 수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결국 정조는 재위 12년에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청남계열들을 등용해 탕평의 규모를 확대하였고 동시에 조정자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화시켰다. 그런 바탕 위에서 즉위 이래 추진해오던 임오의리의 단계적인 천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적인 역할을 채제공에게 기대하였다. 하지만 채제공 계열 인물들의 등용은 일부에서는 환국으로 받아들일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기 때문에 다른 정치세력들은 남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우려하면서 견제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대익과 윤영희 같은 채제공 측근의 비리나 처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채제공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는데 마침 채제공 계열의 인물들이 연루된 천주교 문제가 재위 15년에 진산에서 발생하자 채제공 계열을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진산사건 속에 내재된 정치적 의미를 잘 알고 있던 정조는 ‘扶正學’의 강조라는 가급적 관대한 원칙하에서 사건을 처리하려고 하면서 채제공 계열에 대한 보호 의지를 드러냈고 나아가서는 영남인들의 학문적 순정함을 강조하면서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영남인들을 선발하였다. 이 조치는 채제공 계열의 인물들의 약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그들을 측면에서 지원해주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 직후에 영남의 유생 만여 명이 마치 호응하듯이 연명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모함을 변석하고 의리를 밝히기를 청하는 萬人疏를 두 차례 올렸는데 그 시점이나 그들이 정조에게 받은 호의적인 반응을 감안해본다면 만인소는 사실상 정조 및 채제공과의 사전 교감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임오의리에 관한 문제가 정국의 핵심현안으로 떠오르자 시벽의 갈등은 다시금 더욱 심화되면서 분립은 고착화되어갔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고립되었던 채제공 계열의 청남은 일정하게 정치적 고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목차

1. 서론
2. 정조대 정국의 추이와 전개
3. 진산사건의 전개과정과 청남의 고립
4.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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