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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소 역사연구 역사연구 제32호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179 - 21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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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24년 조선일보 ‘혁신’의 방향과 내용을 검토하고, 그 연장선에서 1925년 조선일보 사원해직사건의 성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혁신’의 흐름과 해직사건이 하나의 흐름 위에서 파악되지 못한다면, 해직사건은 총독부 압박에 따른 굴복이라는 돌출적 사건으로 인식될 소지가 높다. 또한 단일하고 균질하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특정 세력이나 분파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시각이 부각될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 글은 먼저 1924년 9월 이후 조선일보의 ‘혁신’을 이끌었던 인물들을 세 그룹으로 파악하였다. 먼저 신석우를 중심으로 한 경영진 그룹과 이상협을 중심으로 한 신문 실무 경력자 그룹,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 및 사원들이다. 이 인적 구성은 그 자체로도 ‘혁신’의 한 단계였다. 이들이 세 축이되어 ‘조선 민중 언론’으로 조선일보를 재규정하고 신문의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 민중적 논조를 앞세운 질적 측면의 ‘혁신’을 이루려 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사회주의 계열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 조선일보의 ‘혁신’은 상이한 성격을 지닌 그룹들 간의 잠재적 갈등 상태 및 총독부의 감시와 압박이라는 조건을 필연적으로 불러왔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1925년 9월 8일자 사설로 인해 정간사태에 처해지고 집필자가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면서 ‘혁신’체제 자체의 동요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그 해 10월의 사원해직사건 과정에서 문제로 폭발되고 말았다. 이 시기 동안 ‘혁신’을 주도한 그룹들 중 이상협을 비롯한 신문 실무자 그룹은 탈락되었고 사회주의 계열은 축소되었다. 또한 사원 대량해고에 따른 여파로 ‘조선 민중의 언론’이라는 정체성에는 흠결이 가고 말았다. 조선일보 경영진과 화요파 공산그룹은 이면의 합의를 도출하면서 조선일보에 각기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미 1924년 말의 조선일보와는 인적 구성 면에서도, 신문의 논조 및 평판 면에서도 현저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간과 해직사건을 거치는 과정을 특정 한 그룹이 조선일보사 주도권을 독점하려 하거나, ‘혁신’의 가치를 포기하려 했다고는 볼 수 없다. 1924년 조선일보가 지향한 ‘혁신’체제는 1년여 간의 동요와 위기를 거쳐 인적 구성측면에서도 질적 가치라는 측면에서도 1925년 말 시점에는 굴절된 채로 유지되고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Ⅰ. ‘혁신’의 방향-‘조선민중의 언론’으로의 전환
Ⅱ. ‘혁신’의 동요-내부 불안요소와 정간사태
Ⅲ. ‘혁신’의 굴절-사원해직사건과 그 의미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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