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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45호
발행연도
2019.4
수록면
169 - 19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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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년 渤海의 唐 登州 공격으로 시작된 두 나라의 전쟁은 여기에 新羅도 참여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당의 요청으로 참전하게 된 新羅는 발해의 남쪽 공격에 나섰지만, 많은 눈과 추위로 소득없이 퇴군하였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보기병의 陸軍으로서 패강 부근에서 출발하여 泊汋口를 비롯하여 그 상류의 丸都縣城 혹은 神州 일대의 발해의 ‘南境’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와 당이 발해 남쪽을 공격한 시기는 대략 733년 말 혹은 734년 초의 겨울이었다.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無功而還)”는 기록으로 짐작컨대, 신라와 당 연합군은 발해군과의 전투에 패배하였거나 아니면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쪽에서의 두 번째 발해 공격 시도는 734년에 있었다. 이때는 당이 아니라 신라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당은 聖德王에게 “가까운 곳에서 틈을 엿보고 있다가 이들을 엄습하여 그곳을 차지하라”고 하였다. 신라의 두 번째 발해 토벌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당은 金思蘭이 올린 표문을 보고 성덕왕이 浿江에 寘戍(군사보루 설치)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渤海의 요충지에 해당되고, 또 祿山과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었다. 패강에 보루를 설치하는 것은 “도적을 경계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것(警寇安邊)”이며, “원대한 계책”이고 “장구한 계책”이었다.
신라는 패강에 군사 보루 설치를 마치고 그 결과를 보고하고, 이어서 성덕왕 34년(735) 당으로부터 浿江이남의 땅을 사여 받았다. 패강에 보루를 설치하는 행위는 신라와 당의 이해가 일치하였으며, 이 중에 신라가 보다 적극적이었다. 패강 이남의 땅을 획득한 신라는 필요한 시설이나 주민을 스스로 “安置”할 수 있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당의 요청과 신라의 참전
Ⅲ. 신라의 발해 공격 제안
Ⅳ. 패강 지역에 군사 보루 설치(浿江 寘戍)
Ⅴ. 신라의 패강 지역 관리
Ⅵ.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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