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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유표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63호
발행연도
2019.3
수록면
125 - 175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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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1950년대 이후로 중국 요서지역에서는 商末周初 중원계 靑銅禮器가 적잖이 출토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중원문화의 적극적 요서 진출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몇몇 단편적 자료만 가지고 내린 결론으로, 재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요서 출토 청동예기는 族氏 銘文이 새겨진 것이 많은데, 張懋鏞 선생이 ‘周人不用族徽說’에서 밝힌 바와 같이, 周族은 대체로 족씨 명문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요서 출토 청동예기는 殷遺民이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상주 교체기, 주왕실은 은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여러 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 殷商 王族을 책봉하여 은유민을 통제하게 하였고, 둘째, 은유민을 周의 도읍인 宗周 혹은 成周로 이주시켜 周王이 직접 통제하였으며, 셋째, 諸侯를 각지에 冊封하여 은유민을 통제하게 하였다. 요서 출토 상말주초 중원계 청동예기의 출현 또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련 족씨 명문을 정리한 결과, 衛·邢·燕 등 제후가 책봉될 때 여러 은유민들이 북쪽으로 이동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고, 여러 족씨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청동기가 북쪽으로 흘러들어왔을 가능성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주의 북방 진출이 일시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의 북방 공략은, 서주 중기 이후 좌절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북경 및 그 주변에 중원문화유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하북 북부에 있었던 張家園上層文化와 요서지역에 있었던 魏營子文化의 대응에 결국 북방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곧 요서지역에서 商末周初 중원계 靑銅禮器가 출토된 것은, 중원문화의 적극적인 요서 진출이라기보다는 중원문화의 진출에 대한 토착문화의 대응이라는 요인 때문일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遼西 출토 족씨 명문 : 殷遺民의 遷徙 경향을 중심으로
Ⅲ. 商末周初 靑銅禮器의 遼西 출현 배경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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