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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03 - 23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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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마지막 10년은 중국사에서 최대의 격동기였던 근대 시기 가운데서도 중국 사회 전체를 격랑으로 몰아넣은 시기였다. 淸日戰爭으로 중국의 중화주의적 자존이 완벽히 내려 않게 되었고, 이후 열강의 중국 영토 분할은 중국에 개혁, 보수 반동, 혁명이라는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을 가져왔다. 21세기로 진입하는 경계에 위치한 의화단운동은 청일전쟁 이후 격화된 열강의 중국 침략과 분할 점령, 양무운동의 한계를 인식 가운데 추진된 받은 입헌주의 개혁의 실패 등의 자극 속에 산동 지역에서 확산된 민간 무술수련 비밀결사들의 반외세운동으로부터 발전하여 北京, 天津, 화북 및 인접 지역으로 확산된 운동이다. 이에 고무된 西太后 등 戊戌政變을 주도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보수파가 의화단을 공인하고 열강에 선전포고함으로써 1900년 의화단전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열강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辛丑條約으로 마무리하기까지 이르렀다. 본고는 무술정변 이후 좌절을 맞은 변법파 인물들이 이후 발생한 큰 격랑인 의화단운동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보였는지에 대하여 특히 정변 이후 변법파의 정론을 주도했던 양계초가 남긴 기록을 통해 분석해 보았다. 양계초는 戊戌變法을 앞장서서 이끈 康有爲의 문하생이자 개혁의 주요 지도자로서,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중국의 미래 희망을 기대하면서 특히 문필 활동을 통해 개혁의 기조를 확산시킨 인물이다. 무술정변으로 개혁이 좌초되고 동료 6명이 희생되고 대표자인 강유위는 물론 자신도 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새로 창간한 旬刊誌가 󰡔淸議報󰡕였고, 스스로 시국에 관한 글을 많이 실었다. 󰡔淸議報󰡕는 시국 관련 뉴스와 논설을 많이 실어 일본 내외로부터 애독되었다. 양계초는 개혁 좌초 이후 한편으로는 勤王運動도 시도했지만,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그들의 애국주의적인 움직임을 높이 평가하였다. 본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글에서나 익명으로 발표된 논설은 이와 같은 기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8개국 연합군의 참전으로 중국의 국권이 오히려 더 침탈당하는 위기 상황으로 가면서 논조는 의화단의 무모함을 주목하는 쪽으로 이행하였다. 양계초는 1921년 발표한 󰡔中國歷史硏究法󰡕 등 저술에서도 의화단운동을 역사 연구 방법론을 설명하는 샘플로 적극 동원하였다. 특히 인과관계 분석을 설명하면서 의화단운동의 배경 요인들을 다양한 구조로 구분 설명하였다. 아울러 의화단운동의 성격에 대한 평가도 시도하였으며, 의화단운동 연구와 관련된 주목할 만한 주제들도 제시하였다. 양계초는 의화단운동 참여 민중의 애국적 동기 등에 대해서는 존중하였지만, 그들의 미신적 맹목적 행동이 결국 중국의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중국 최대의 위기를 가져온 핵심은 변법을 좌초시키고 정변으로 보신을 지향한 서태후 등 보수파였다는 점도 기본적으로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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