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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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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55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25 - 366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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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의 연행록 『연대록』과 통신사행록 『해사록』을 텍스트로 삼아, 그의 사행에 대한 태도 및 대중․대일 인식을 고찰하였다. 신유는 일본 통신사행에 대해 ‘한묵(翰墨)’으로 양국간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조 신숙주가 1443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기 때문에 사행이 집안의 전통이라고 생각하였다. 연행(燕行)에 있어서 명나라에 갔느냐, 청나라에 갔느냐에 따라 신유의 태도가 달라졌다. 박수문이 1635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신유는 박수문의 조천(朝天)을 부러워하며, 조천을 통해 학식과 마음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652년에 신유 자신이 청나라의 연경에 갔을 때 그는 “이왕(二王)을 섬기고 있다”고 자책하며, 명나라를 배신한 행동이라고 인식하였다. 신유는 일본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행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경치와 문학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성대한 일본 풍경을 시로 기록하였으며, 일본에도 문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야시 부자를 비롯한 일본 승려나 문인과 문학 교류를 하였다. 그들과 한시 수창을 하고, 그들을 통해 일본의 지리․문학․역사 등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하야시 가문 부자의 문학 수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통신사행 때의 신유는 사신 이외에 여행자와 문인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신유는 연행 도중에 전쟁 유적을 탐방하며 명나라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시로 표현하였다.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묘사하는 시는 한 수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회고시를 통해 반청의식을 표출하였다. 명나라 추종자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같이 대일․대중 인식의 차이가 난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신유는 병자호란의 참상과 고통을 직접 느꼈던 사람이다. 반면에 임진왜란은 신유가 출생 전에 일어났고, 임진왜란이 이미 51년이나 지나서 일본을 방문했으므로 청나라만큼 일본을 미워하지 않았다. 둘째, 조선에서 소중화사상이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소중화사상은 구체적으로 ‘중화회복의식’과 ‘중화계승의식’이 있는데 신유는 ‘중화회복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명나라의 멸망으로 더욱 깊어졌으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명나라 멸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서 청나라만큼 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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