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방기철 (선문대학교)
저널정보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통일인문학 제81집
발행연도
2020.3
수록면
321 - 351 (31page)
DOI
10.21185/jhu.2020.3.81.32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선조~인조대 활약했던 오윤겸이 일본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구명한 것이다. 오윤겸은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했고, 평강현감을 지냈다. 전쟁 경험은 그에게 일본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1609년 7월~1610년 9월 오윤겸은 동래부사를 지냈다. 이때 그는 대일외교 현안을 해결하면서, 일본 사신의 접대와 관련된 규정들을 만들어 나갔던 것 같다. 1617년 오윤겸은 회답사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사행 전 그는 사행단의 밀무역 금지, 일본에서 돌아온 피로인의 사행금지 등을 주장했다. 또 일본이 조선 사신을 인도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일본을 의심하면서, 조선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의 일본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행 중 오윤겸은 쓰시마를 조선의 번병으로 규정하여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면서도,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일본의 덴노와 정치체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일본의 음식과 숙소, 사신 접대 등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일본의 경제적 번영에 대해서도 긍정적 시각을 보였다.
사행 후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오윤겸은 왜관에 있던 일본인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1629년 쓰시마에서 보낸 사신은 상경을 요구했고, 상경 후에는 공무목의 추가지급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는 유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조선의 국익을 우선시하였다. 야나가와 잇켄 이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이를 부정하는 등 일본을 신뢰했다.
오윤겸은 사행을 계기로 일본에 대해 유연한 시각을 보인 반면, 여진족에 대해서는 적대감과 불신감을 나타냈다. 이는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일본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당시 조선의 대외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일사행 경험이 그의 대일인식에 영향을 미쳤고, 사행후 그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거두고 조선이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대일정책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사행 전 화이론적 일본인식
3. 사행과 긍정적 일본 인식
4. 사행 후 실리적 일본인식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3)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0-001-000529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