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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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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83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21 - 14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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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은 일본의 침략을 맞아 병조판서를 5차례나 역임하는 등 국난극복의 전면에서 활약한 일물이다. 그는 일본은 충분한 준비를 한 후 조선을 침략한 것으로 여겼고, 일본의 조선침략은 명을 침략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겼다. 때문에 명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선조의 명으로의 망명도 주장했다. 한편 그의 이러한 주장은 도승지로서 선조의 뜻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벽제관전투에서 패한 후 명이 강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려 할 때 이항복은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곧 명의 강화안을 받아들였다. 조선이 명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과 일본의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이항복은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도 소규모 왜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고, 일본군의 재침을 염려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국방 강화를 주장했다. 전후 일본이 국교재개를 요청해 왔을 때 이항복은 왜구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쓰시마에 대한 통상을 허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일본과의 국교재개도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교재개는 조선이 우월한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항복은 화이론에 입각하여 일본을 이적시하였다. 때문에 일본의 언어와 풍속 등이 조선에 영향을 준 것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인의 성품이 강하다는 사실, 군령이 엄하다는 사실 등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이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즉 그는 군사적인 부분에 한정된 것이지만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일정한 변화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항복은 쓰시마나 일본을 다녀오지 않았고, 대일외교 전면에서 활약한 경험도 없다. 그가 대일정보를 얻은 경로는 대부분 명 사신의 접대를 통한 간접적인 것이었다. 또 다른 경로는 이덕형을 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쓰시마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여긴 점, 쓰시마와 조선을 분리하여 바라본 점, 일본의 군사력이 조선 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점,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반대하지 않은 점 등은 이덕형의 대일인식과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항복의 대일인식은 이덕형의 일본관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거나 상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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