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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한민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7호
발행연도
2019.11
수록면
69 - 101 (33page)
DOI
10.21490/jskh.2019.11.7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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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876년 조선이 개항한 이후 일본 도쿄에 주차하는 공사를 파견하기 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파견한 사절을 검토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188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파견한 수신사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 기초하여 사절의 구성과 활동을 개관하였다. 1885년에는 명칭을 흠차대신으로 바꾸어 徐相雨와 묄렌도르프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다섯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은 모두 조일수호조규 제2관의 규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처음 사절을 파견할 때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사절이나 공사에 대한 답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서부터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가운데, 점차 조약에 기초한 실무 교섭으로 사절의 성격이 바뀌어 나갔다. 수신사가 가지고 간 국서와 전권위임장 등의 공문서에서는 기존의 외교 관계에서는 쓰지 않았던 용어가 등장하였다. ‘大君主’, ‘朕’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상대국과의 국격을 대등하게 맞추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또한 3차 수신사부터 기존 사절의 한 단계 급을 올려서 종2품에 있는 인물들을 정사로 선발하였는데, 이것은 흠차대신 파견까지 이어졌다. 갑신정변 발발 이후 일본으로 파견한 서상우 사절에는 처음으로 ‘欽差’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조선 정부에서 언제부터 그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를 그 기원을 검토하였다. 조선에서는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에서부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근대적 외교를 담당하는 외아문을 설치한 이후 일본과의 관계에도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양국 관계가 조약 체제로 개편된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다만 청국과의 외교 관계에서는 ‘흠차’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상우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정부와 세 가지 현안을 교섭하였다. 여기서는 안건별로 논의하게 된 맥락과 처리 과정을 검토하였으며, 사절 파견에서 실무적 성격이 강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들어가며
2. 수신사 파견 시기의 활동과 특징
3. 欽差大臣의 파견과 현안 교섭
4. 나가며
참고문헌

참고문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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