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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훈 (한림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6집
발행연도
2019.11
수록면
37 - 91 (55page)
DOI
10.18496/kjhr.2019.11.6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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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624년의 회답겸쇄환사 파견을 조일 양국의 국정운영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인조 즉위 후 1623년 10월 수립된 후금(後金) 대비책의 핵심은 남쪽 병력을 서북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 대비책이 1625년 9월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추진되게 된 결정적 계기를 회답겸쇄환사의 귀국 보고 (1625년 3월)로 보았다. 회답겸쇄환사 일행은 인조의 특별지시에 따른 일본 정탐 결과, 일본이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한 진의가 反도쿠가와(反德川)다이묘(大名)의 동요로 인한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임을 파악해 왔다. 그 결과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료들의 병력 이동 논쟁을 종식시키고 후금 대비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개작(改作)되기 이전의 인조 국서를 검토한 결과, 일본의 경조사(慶弔事)에 대한 조선의 사자 파견이 명(明)의 허락사항이라는 선조 및 광해군대의 대일본 통교방침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후금 대비책이 긴급했던 안보상황에서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한 ‘권의지책’(權宜之策)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막부 쇼군(將軍)의 답서는 쓰시마번(對馬藩)의 개작 이전과 이후를 불문하고, 조선이 이에미츠(家光)의 쇼군 습직 소식을 듣고 “먼저 자발적으로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했다는 식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혔다. 이는 새로운 쇼군 습직에 대해 이웃나라 외교사절의 축하라는 국제적 인지 절차를 통해 反도쿠가와 다이묘를 진정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세습정권으로서 막부 권력을 분식(粉飾)하기 위해 조선의 사자 파견을 ‘자발적’인 것으로 연출하려 했던 것은, 1624년의 회답겸쇄환사를 시작으로 1643년의 이에미츠(家光)의 아들(若君) 탄생 축하를 위한 계미통신사, 1655년 쇼군 이에츠나(家綱)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을미통신사 때까지 계속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인조 즉위초 후금(後金)의 위협 고조와 병력 이동 논쟁
3. 1623년 도쿠가와 막부의 통신사 요청과 조선의 대응
4. 1624년 제3차 회답겸쇄환사의 국서(國書) 전달과 ‘인호’(隣好)의 의미
5. 회답겸쇄환사의 귀국보고와 남쪽 병력의 서변(西邊) 이동 결정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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