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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종숙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저널정보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한국문학과예술 제34집
발행연도
2020.6
수록면
5 - 38 (34page)
DOI
10.21208/kla.2020.06.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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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진안에 〈금척무(金尺舞)〉가 공식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4년 10월이다. 1984년 마이산신제(馬耳山神祭)로부터 〈금척무〉는 진안의 문화역사를 나타내는 춤으로 인식되었다.
〈금척무〉란 조선이 건국된 후, 정도전(鄭道傳)이 새로 만든 음악 가사를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헌정하여 그 악곡으로 만든 춤을 말한다. 이성계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을 때 꿈에서 신인(神人)이 금자를 주며 새 국가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를 표현한 춤이다. 그런데 1966년에 쓰인 『대한이산묘지(大韓駬山廟誌)』에 이성계가 꿈꾼 장소를 마이산(馬耳山)이라고 지정한 기록이 있어서, 이 기록을 근거로 진안의 황안웅(黃安雄)과 황순필(黃純弼)이 진안 마이산을 유명하게 할 계획을 꾸몄다. 때마침 서울에서 1980년 6월에 국립국악원 김천흥(金千興)에 의해 조선의 궁중 연회용 무용인 〈몽금척(夢金尺)〉이 재현 공연되었는데, 진안의 두사람이 김천흥을 찾아가서 그 춤을 진안에 전수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전주에 거주하는 전통무용가 김광숙(金珖淑)이 서울에서 〈몽금척〉을 먼저 배운 후, 진안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그 춤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로부터 〈금척무〉는 진안마이제 홍보의 중요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진안의 전통무용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근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까지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진안에서는 조선시대의 한 문화로 탄생한 〈금척무〉의 근본 의미나 용도가 고려되거나 연구된 바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단지 황안웅, 황순필과 같은 개인에 의해 〈금척무〉가 1980년대 처음 채택되었고 진안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를 활용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연구자는 이 점으로 인해 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문제가 발생했고, 오늘에 이르러 역사 왜곡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 연구에서는〈금척무〉의 조선문화로서의 내용적 의미나 국가의 큰잔치에 사용되었던 본래 용도에 맞지 않게, 진안축제에 사용되는 점과 진안의 전통춤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진안에서 〈금척무〉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안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금척무〉가 전라북도 진안에 유입되고 전개된 과정을 한국 현대 무용사의 측면에서 기록하는데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금척무〉의 진안 소유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
2. 〈금척무〉의 조선 문화사적 의미와 용도
3. 〈금척무〉의 진안 이입과정과 전개
4. 맺음말: 〈금척무〉 진안 활용의 진단과 새 방안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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