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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성영애 (숭실대학교)
저널정보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한국문학과예술 제35집
발행연도
2020.9
수록면
205 - 247 (43page)
DOI
10.21208/kla.2020.09.3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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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연산군대 여악(女樂)이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확대되었는지 그 전개 양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이를위해 무오사화 전후에 논의된 음악적 사안을 살펴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여기(女妓)의 명칭 변경과 인원증대, 7원(院) 3각(閣) 제도와 악기제작과 수집 그리고 악장 개찬을 중심으로 연산군대 여악 정책이 확대되는 전개 양상을 고찰해 보았다. 또 시기를 삼분(三分)으로 나누어 무오사화 전후를 첫 번째 · 두 번째 시기, 갑자사화 이후를 세 번째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두 사화(士禍) 이후 삼사(三司)가 상당히 위축되는 대신에 국왕은 그만큼 자유로웠다. 연산군은 사치와 사냥, 연희 등과 같은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 중에서 연희는 다른 일탈과는 달랐다고 생각됐다. 그 이유는 연산군 나름대로 여기의 명칭뿐만 아니라 장악원(掌樂院)에 종사하는 관직명을 변경하였고 또 악명(樂名)을 지었으며, 여기의 인원이 증대되어 수용할 7원(院) 3각(閣)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였다. 또 수많은 악기를 제작하고 수집했으며 그리고 악장 개찬뿐만 아니라 음악 선율에도 관심을 가지고 곡조를 선택하는 자신만의 악장관(樂章觀)을 가졌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연산군대의 여악은 여악을 확대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산군대는 생모 폐비 윤씨의 보복과 자신의 광적인 유연(遊宴)으로 말미암아 여악이 연산군을 위한 향락(享樂)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연산군대는 여악의 존폐에 관한 시비론보다 여악으로 시작해서 여악으로 끝나는, 조선시대 어느 왕들보다 사뭇 다른 여악 정책을 펼쳤다. 이 연구는 그간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지지못했던 연산군대 여악 정책을 확대하여 전개하는 양상을 보여주었고, 또 정치적 측면과 함께 여악 정책을 이해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무오사화(戊午史禍) 전후에 논의된 음악적 사안
3. 여악(女樂) 확대정책의 전개 양상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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