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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미애 (가톨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목간과문자 제25호
발행연도
2020.12
수록면
79 - 103 (25page)
DOI
10.35302/wdis.2020.12.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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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미륵사지 서탑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미륵사에 대한 많은 논란이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여전히 창건 주체와 시기를 비롯하여 미륵사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진 「사리봉안기」와 관련한 논의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리봉안기」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사리봉안기」에 대한 논란은 미륵사의 조영주체와 조영시기에 대한 논의가 중심을 이루었다. 조영주체에 대해서는 사택왕후설, 선화설, 무왕설 등이 제기되었다. 미륵사의 경우 왕실 원찰을 넘어 당시 백제의 국력을 기울인 사찰이라는 점에서 무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사찰로써 건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조영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미륵사가 오랜 기간 동안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는 미륵사의 규모와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기반한 추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사는 왕실의 원찰을 넘어 강력한 백제국의 상징으로 건립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미륵사 조영의 실질적 주체는 무왕이었으며, 사택왕후를 비롯하여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금제소형판 등에 기록된 다양한 사람들은 이러한 무왕의 뜻에 호응하여 미륵사의 조영에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왕은 이를 통해 백제의 국력을 결집시키고, 보다 강력한 백제의 건설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사리봉안기」 연구의 주요 쟁점과 「사리봉안기」 검토
Ⅲ. 무왕 후반~의자왕 초반 政局과 「사리봉안기」의 의미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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