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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종원 (한밭대학교)
저널정보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백제문화 제54호
발행연도
2016.2
수록면
285 - 31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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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무왕조와 <舍利奉安記>의 내용은 무왕대 미륵사가 조영된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들 두 자료는 미륵사 창건 주체와 시기 등에 있어서 상이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자료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이해가 필요하다. 그 동안 미륵사의 조영 문제를 밝히는데 있어 『三國遺事』 무왕조가 논거의 핵심이었는데, 미륵사지 서탑에서 <舍利奉安記>가 출토됨으로써 미륵사의 조영주체로 沙?왕후의 존재, 조영시기도 무왕 40년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三國遺事』 무왕조가 일정부분 역사적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익산지역은 무왕의 성장지이자 정치적 기반이었다. 그로 인해 무왕은 익산경영을 통해 왕권을 안정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사가 창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무왕은 즉위후 많은 정치적 현안으로 인해 바로 익산에 대규모 사찰을 조영할 여유가 없었다. 또한 미륵사의 창건을 발원한 것도 선화왕비였다. 따라서 미륵사의 초창을 주도한 세력은 무왕과의 혼인을 통해 정치적 관계를 맺고 그의 즉위를 도왔던 선화왕비로 상징되는 익산지역 재지세력이었으며, 그 지역 불교세력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창건 시기는 고고학적인 자료와 『三國遺事』 무왕조의 내용 등으로 볼 때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미륵사지 서탑에서 <舍利奉安記>가 출토됨으로써 조영 주체로 선화왕비 이외에 사씨왕후가 확인되었으며, 서탑의 조영시기도 무왕 40년을 전후한 시기로 드러났다. 그로 인해 미륵사 창건 주체 및 시기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미륵사의 창건 주체를 사씨왕후를 중심으로 한 사씨세력으로 보고, 익산지역을 사씨의 세력기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무왕 31년 사비환궁이 이루어진 이후에 사씨왕후에 의해 미륵사가 조영되었다는 사실은 사씨의 정치적 기반이 사비지역이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해하기 곤란하다. 특히 미륵사의 창건이 무왕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인장와 등 고고학 자료를 통해 확인되었다. 따라서 무왕 후반기에 재등장한 사씨왕후나 그 세력에 의해 전적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왕 후반기 미륵사의 중창은 당시의 정치상황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왕 28년 사씨세력의 재등장, 31년 사비로의 환궁, 33년 의자의 태자 책봉 등의 정치적 변동과정에서 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익산지역 재지세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와 함께 익산세력 출신 왕비의 발원으로 창건되고 익산 재지세력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미륵사는 사씨세력과 새로운 왕후에 의해 중창됨으로써 그 상징적 성격이 변질되었다. 비록 그 중심에 무왕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는 주도적인 역할에서 한 발 비껴나 있었다. 사씨세력이 미륵사의 중영에 관심을 가진 배경에는 익산세력의 해체와 함께 의자왕대, 나아가 의자왕 사후 사씨세력의 권력 독점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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