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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윤정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42권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257 - 312 (5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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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219년부터 1278년까지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몽골의 요구와 고려의 대응 속에서 소위 ‘六事’의 실체를 구명함으로써 양국 간 30여 년 전쟁의 원인과 1278년 충렬왕의 친조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몽골의 요구가 ‘六事’로 불리게 된 계기는, 대칸이 된 쿠빌라이가 자신의 독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안남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6가지 사항’이 안남의 거부로 이행되지 않음으로써 그 개별 항목이 그대로 형해화되어 14세기 이후 ‘六事’라는 개념으로 고착화 된 결과였다. ‘助軍’은 ‘六事‘ 중 한가지 항목이 아니라 ’六事‘의 실체가 助軍으로, 복속국에 군대와 물자를 내어 전쟁을 돕도록 요구한 것이다. ‘六事’가 곧 ‘助軍’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몽골이 六事를 요구한 시기와 고려가 그것을 이행한 시기를 살펴보면, 1219년의 ‘형제맹약’은 공물징수를 핵심으로 하는 ‘우호적 불평등관계’였다는 점에서 六事가 요구되지 않았다. 1231년에 진입한 몽골과 고려는 강화를 맺었지만 동진을 치는데 조군하라는 요구는 무신권력이 강화를 파기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는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몽골과 고려의 30여 년 간의 파괴적 전쟁은 助軍, 즉 ‘六事’ 이행을 둘러싼 갈등의 결과였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위 정쟁을 앞두고 원종에게 고려왕조(왕권, 영토, 백성)의 온전한 존속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262년 말부터 고려에 ‘助軍’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1232년처럼 고려조정 내의 갈등을 야기시켜 무신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태로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즉위 초의 약정을 무효화시켜 동녕부를 설치하였고, 복위 후에도 원종은 여전히 ‘六事’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278년의 친조에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에 자발적으로 ‘助軍’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즉각 몽골군대와 다루가치, 홍차구를 고려 경내에서 몰아내었다. 1278년 쿠빌라이와 충렬왕의 만남은 고려가 ‘六事’ 이행을 약속하고 실행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무신집정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助軍을 거부하였고, 충렬왕은 자신의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助軍을 이행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요컨대, 몽골은 1231년부터 고려에 ‘六事’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1278년부터 ‘六事’를 이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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