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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선아 (전북대학교 이재연구소)
저널정보
한국실학학회 한국실학연구 한국실학연구 제3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07 - 141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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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원은 숙종 20년(1694)에 충청도 충주목의 소론 가문에서 태어나 숙종 44년(1718)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올랐다. 류수원의 본격적인 정치적 행보는 경종이 즉위한 이후에 확인된다. 류수원은 신임옥사가 전개되는 정국에서 소론을 이끌고 있던 조태구와 소론 핵심인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소론은 완론과 준론의 노선의 차이가 드러났지만, 노론이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는 국면에서 공조하여 소론정권을 수립하였다. 때문에 조태구를 탄핵하는 류수원의 상소는 소론의 갈등을 드러내고 균열을 야기할 사안이었다. 조태구를 탄핵한 상소를 올린 이후 류수원은 外職을 전전하다가 영조 4년(1728)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류수원은 출사하지 않고 무신난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는 발언을 통해 조태구 탄핵상소로 인한 정치적 혐의를 벗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태구를 탄핵하였다는 류수원의 행적은 그의 관직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 소론 탕평파가 그에 대해 ‘박학한 지식[淹博之識]과 주밀하고 통달한 재주[周達之才]’를 지녔다고 적극 추천하였으나 그의 관직 임명은 계속 논란이 되었다. 이런 논란은 류수원의 『우서』가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수그러들었다. 소론 탕평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영조는 『우서』를 친람하였다. 영조는 류수원의 『우서』와 『문헌통고』를 비교하면서 류수원에 대해 ‘나보다 낫다’고 평가하였으나 『우서』의 개혁안에 대해서는 오활하여 시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소론 탕평파는 류수원의 『우서』를 탕평을 위한 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는 경세서로 평가하고 실행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특히 영조 16년(1740)에 임인옥사를 誣獄으로 판정하고 노론의 정치력이 회복되는 상황에서 조현명을 비롯한 소론 탕평파는 탕평을 이루기 위해 정치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류수원의 『우서』에서 제안한 관제 개편안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소론 탕평파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류수원의 정치개혁안은 전격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 17년(1741)에 辛酉大訓이 반포된 이후 신임옥사와 관련된 혐의를 벗은 영조는 점차 노론의 신임의리 위에 정국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노론탕평의 명분 아래 류수원과 그의 『우서』에 대해서도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고, 류수원은 10여 년의 廢錮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류수원은 영조 31년(1755)에 일어난 乙亥獄事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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