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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정선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저널정보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日本學(일본학) 日本學(일본학) 제48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345 - 37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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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50대를 주된 대상 시기로 삼아 해방 이후 일본에 잔류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활동에 주목하여 그들의 활동 양상을 가시화해보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태동기 재일조선인 미술 연구는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과 민족주의적 특성이라는 말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문화적 실천 행위를 민족주의로 수렴하는 지나친 일반화는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애매하게 만드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 논문은 동시대에 활동한 재일조선인 화가 전화황과 조양규를 나란히 두고, 그들의 재일의식의 추이를 고찰하였다. 식민지기 일본으로 건너가 해방 이후 일본에 잔류하며 교토 화단에서 활동한 전화황과 해방 후 일본으로 밀항하여 1950년대 일본 화단의 주목을 받았던 조양규는 공통적으로 6.25전쟁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1950년 중반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화가로서 ‘굴절’의 시기를 거치며 각각 다른 행보를 보인다. 전화황은 1950년대 중반부터 ‘평화관음’에 천착한다. 그리고 60년대로 넘어가면서 점차 스다 구니타로의 미학적 관행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게 된다. 그는 불상을 소재로 삼아 민족, 인종, 이데올로기, 종교의 문제를 넘어, 인간 공통의 보편적 문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한편, 조양규는 1950년대 중반 <창고>연작에 돌입하면서부터 더 이상 조선인부락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것을 그만둔다. 이 시기부터 조양규에게 있어서 ‘조선’은 더 이상 그의 작업의 준거가 되지 않았다. 조양규는 ‘굴절’의 과정을 거쳐 일본 화단의 문법을 따르면서 주류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도는 일본땅이 더 이상 임시의 공간이 아니라 정주의 공간이라고 판단한 시점에서 일본 화단의 화법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게 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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