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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동연 (청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46권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317 - 35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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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용굉(容閎, 1828~1912)이 청말 근대외교에 미친 영향을 탐색한 글이다. 그동안 용굉에 대해서는 청 정부가 미국에 보낸 국비 유학생, 이른바 ‘유미유동(留美幼童)’을 인솔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용굉의 활동은 청 정부가 서양 국제법에 토대를 둔 근대외교를 수용하는 과정과 중첩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그가 지닌 외교사적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용굉은 어린 시절 광둥 지역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곧 이어 미국인 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예일대학에서 서양 지식과 가치관을 습득하였다. 귀국한 용굉은 중국이 근대외교에 뒤처져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한때 태평천국에 가담할 생각을 품었던 것도 이들이 청을 대신하여 중국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굉은 서양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하다는 이유로 청 정부의 실권자 증국번(曾國藩)의 막료로 발탁되었다. 용굉은 서양 기계를 도입하는 임무를 완수하여 증국번의 신뢰를 얻은 다음, 어린 학생들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사업을 승인받았다. 1872년부터 파견된 120명의 유미유동은 용굉의 인솔 하에 서양식 교육을 받았지만, 1881년 청 정부의 지시로 중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 시기 용굉은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근대외교를 직접 실행하였다. 그는 외국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숙할 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활용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쿨리 학대 문제를 조사하여 보고함으로써 청 정부가 페루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청이 설립한 주미공사관의 초대 참찬(參贊)이 된 후에는 공사(公使) 진란빈(陳蘭彬)을 보좌하며 미국 내의 반중 정서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유미유동이 중도 귀국한 후에는 한동안 미국에서 칩거하였지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군함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차관 도입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용굉이 양성한 유미유동은 청말 근대외교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청 정부가 해외에 설립한 공사관(公使館)과 영사관(領事館)에서 근무하였고, 이를 토대로 의화단사건 이후 설립된 외무부(外務部)의 고위 관료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한공관(駐韓公館) 경력을 토대로 외무부로 옮겨 활동한 당소의(唐紹儀)와 양여호(梁如浩)는 중화민국에서 외교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용굉은 유미유동을 통해 근대외교의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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