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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성연 (동국대학교 K학술확산연구소)
저널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동국사학 제75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109 - 140 (32page)
DOI
10.22912/dgsh.2022..7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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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금강산 사찰들의 수적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유람록과 각종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그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조선 후기의 관찬지리지에는 대략 30개소 정도의 사찰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의 유람록을 보면, 100개 이상의 사암(寺庵)이 금강산에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일정한 규모와 전통성을 지니고 유지·관리되었던 사암과 단지 수행을 위한 기도처 정도의 암자들로 시기에 따라 존폐를 거듭했던 정황들이 합쳐져 각기 찬술 목적에 따라 다르게 반영된 까닭이다. 근대 금강산 사찰의 현황은 19세기 말과 일제강점기의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9세기 말은 두 편의 금강산 유람록을 바탕으로 했는데, 두 기록에서도 금강산의 사찰은 대략 30개소 정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기존 사암들의 존폐 정황과 승려에 대한 인식 등이 서술되어 있어 금강산 불교의 변화상을 유추하는데 도움이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사찰들의 본산인 유점사가 발행한 자료들과 교단 중앙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보이는 사찰 통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들 자료에서는 대략 35~39개 정도의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역사성, 전통성을 간직한 금강산의 사찰들은 일제강점기에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근대성의 표상이자 민족 정체성을 지닌 곳으로 변화하였다. 일제의 간섭과 통치 속에서 민족적 자립과 자각을 요구하는 민족성 고취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오늘날에는 통일의 물고를 틀 중요한 매개 역할이 되기도 한다. 이미 금강산 관광이 시도되면서 남과 북의 협력으로 신계사가 복원되기도 했다. 남과 북의 정치적 문제와는 별도로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강산 사찰에 불교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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