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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63호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151 - 17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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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조선왕실의 풍패지향(?沛之鄕)이다. 풍패란 건국자의 고향을 말한다. 본고는 조선왕조의 전주에 대한 풍패 인식과, 영조대 왕실의 시조 사당 조경묘(肇慶廟) 창건의 의미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조선의 풍패는 태조의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와, 태조가 태어나고 살았던 영흥ㆍ함흥 일원 두 곳이다. 넓게는 전주가 속한 전라도, 영흥ㆍ함흥이 편제된 함길도가 풍패로 인지되었다. 조선 건국후 전주에 대한 풍패 인식은 영흥과 함흥 일원에 비해 강하지 않았다. 전주에 대한 조정의 풍패 인식은 임진왜란을 거치고, 가문중시 풍조가 일면서 조선후기에 강화되었다. 영조대 조경묘 창건은 이를 상징하는 일이다. 조경묘는 조선왕실 최초의 시조 사당으로 영조 47년(1771) 전주 경기전 북편에 창건되었다. 조경묘 창건은 시조 중심의 가문 중시 사회를 맞아서 시조를 정점으로 왕실가를 재확립한 것이다. 영조는 정치체제를 정비 개편하는 한편 왕실의 위엄을 높여 조선의 중흥을 이루려고 하였다. 조경묘를 창건하고 조선의 창업을 수덕(樹德)의 역사로 보게 됨에 따라 시조 이한이 살았던 전주는 조선왕실의 아득히 먼 고향이 아니라 창업이 시작된 실제적 고향으로 격상되었다. 조경묘 창건으로 전주는 조선왕실 근원지지(根源之地)로 확고히 자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영조는 시조를 정점으로 왕실을 재확립하고, 왕실 근원의 중심을 영흥ㆍ함흥 일원의 동북면에서 전주로 옮겨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경묘 창건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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