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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藏書閣 제50집
발행연도
2023.10
수록면
176 - 204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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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뿌리 깊은 숭불사상의 영향으로 왕의 어진뿐만 아니라 왕비의 초상화를 그려 原廟나 願刹 등에 봉안하고 天福을 기도해 왔다. 왕비의 초상화를 그린 목적은 복을 빌고 제사를 지내는 祭儀的 의미와 함께 왕손들로 하여금 조상을 추모하게 하려는 뜻에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 왕비의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그린 왕비의 초상화는 신의왕후, 신덕왕후, 정안왕후, 원경왕후, 소헌왕후, 정희왕후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초상화는 도화원의 전문화가들에 의해 그려져 원묘나 선원전에 보관되었으나, 그 외에 사적으로 승려들에 의해 그려져 원찰에 봉안된 것들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종 대 중반 이후에는 왕비의 초상화는 그려지지 않았다. 왕비의 초상화 제작이 중단된 원인은 억불정책과 이에 따른 불교적 관습의 쇠퇴와 유교 사회의 진전에 따른 유교식 제례로의 변화, 그리고 내외법의 강화 때문이었다. 성리학과 『주자가례』의 보급에 따라 조선 건국 후 풍습을 비롯한 전반적인 의식이 불교식에서 유교식으로 바뀌면서 제례에서 불교식 영정 대신 유교식 위패로 대체되었다. 또 내외법이 강화됨에 따라 왕비의 초상화를 남성 화원이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위패 중심의 유교식 제례로의 변화와 내외법의 강화로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전통은 사라졌다. 더욱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전에 남아 있던 왕비의 초상화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후 17세기 말에 서화를 좋아했던 숙종이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시도했지만, 내외법에 어긋난다는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혀 결국 좌절되었다. 이후 왕비 초상화를 그리는 문제는 전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는 대한제국기 왕실 여성들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왕비도 얼굴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태조~성종 초 왕비 초상화 제작 실태
Ⅲ. 성종 대 중반 이후 제작 중단과 그 원인
Ⅳ. 숙종 대 왕비 초상화 제작 시도와 좌절
Ⅴ.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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