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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손영문 (문화재청)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미술사 제62호
발행연도
2024.6
수록면
55 - 93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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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그동안 쌓아온 불교미술의 성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전란이 끝난 직후 불교계는 사라진 전대의 성과물을 재건하는데 온 힘을 다한 시기였다. 불교계는 재건에 필요한 시스템을 정비하고 불사에 필요한 匠人를 육성하였다. 인균(印均)은 17세기 전반기부터 중반까지 불상조각에 두각을 나타낸 승장(僧匠)이었다. 그는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문도(門徒)로 팔도도총섭 체제의 승군(僧軍)에 소속된 승장(僧匠)이었으며, 전라도 지역 사찰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였다. 그는 1614년 무안 목우암 불상 제작을 시작으로, 1662년 전주 학소암 불상에 이르기까지 약 48년간 쉼 없이 조각활동을 펼쳤다. 최근 무안 목우암(1614년)을 비록하여 자수사·인수사 불상(1622년), 광양 백운사(1643년), 청도 장연사(1643년) 등에서 인균이 참여하여 제작한 불상이 새롭게 확인되어 인균 작품에 대한 생애사적 연구 자료가 구축되었다. 1610년대 인균은 그의 조각적 스승이자 선배인 각심(覺心)과 태전(太顚)과 함께 조각 작업을 펼치며, 최고의 조각승으로 성장하기 위한 실력을 다져가던 시기였다. 1620년대 그는 비록 독자적인 유파를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선배인 응원의 작품 활동을 도우며 17세기 불상조각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왕실사찰 자수사(慈壽寺)·인수사(仁壽寺) 불상 제작에 팔도(八道)의 대표 조각승으로 참여하였다. 1630년대 그는 화엄사 대웅전 불상조성과 같이 큰 불사에서 선배인 응원과 함께 조각활동을 펼쳤으나, 귀신사 불상같이 중·소규모의 사찰불사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하여 수(首)조각승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 그는 수조각승으로서의 많은 후배·제작들을 이끌며 1662년 전수 학소암 불상제작까지 활동하였다. 그와 함께 조각활동에 참여했던 천신(天信), 삼인(三忍), 색난(色難) 등은 인균의 조각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특히 색난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조각승이었다. 이와 같이 인균은 각심·태전-응원·인균-천신·삼인-색난으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조각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각승 계보를 형성하며 조선 후기 불교조각을 주도하였다. 인균의 작품은 순박한 얼굴에 각진 코뿌리와 우뚝 솟은 돌출코, 두툼한 양감을 강조한 얼굴과 복주머니 형태의 입술주머니, 다른 조각승과 달리 둥글고 부드럽게 구현한 신체 굴곡, 부드러운 신체 굴곡에 상응하는 부드럽고 유려한 선묘를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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