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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모리 마유코 (도쿄여자대학)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86호
발행연도
2024.12
수록면
7 - 4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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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불린다. 일본에서 청일전쟁에 대한 선행연구는 매우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특히 개전 과정에 큰 관심이 집중되어왔다. 그러나 조선의 내정 문제였던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청일전쟁으로 귀결된 흐름에 대해 조선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진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와 『리훙장전집(李鴻章全集)』을 기초사료로 삼고, 조선 정부의 관점에서 본 청일전쟁 개전 과정을 논하는 연구에서는 처음으로 다루는 영국 외교 문서(F.O.228/1161 및 F.O.228/1168)와 주진독리통상사무(駐津督理通商事務)의 직무일지인『구한국정부외교문서철(舊韓國政府外交文書綴)』 제11책을 이용하여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논하고자 한다.
첫째,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1894년 3월에 일어난 김옥균 암살 사건과 동시에 발생한 박영효 암살 미수 사건에서 비롯된 주일공사 유기환의 이임 귀국강행이, 조선 정부의 일본 인식 및 중국과의 관계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한다. 둘째, 동학농민군이 세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조선 정부 내에서 청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차용론이 전개되는 정책 결정 과정을 정리하고 그 배경을 검토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1894년 5월 31일의 전주 함략을 계기로 고종의 청군 출병 요청에 대한 생각이 변화한 일에 주목한다.
청군 차용 결정에 이르기까지 약 2개월 동안의 외교적 교섭을 돌아보면, 조선 정부는 조약이나 국제법을 활용한 대응이 아니라, 리훙장과 위안스카이와의 조중(中朝) 관계를 축으로 삼고, 일본을 제외한 외국 사신들을 아군으로 삼아 자국의 뜻대로 상황을 이끌어나갔다. 이러한 시기적 흐름 속에서 일본 외교는 1894년 4월까지도 조선, 청, 조선과 중국의 긴밀한 관계 앞에서 강하게 나설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가 그 직후에 일어날 일본의 출병 가능성을 고려하기는 어려웠다.

목차

I . 머리말
II . 조중 관계의 긴밀함에 따른 갑신정변 처리: 김옥균과 박영효 암살 시도
III .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청군 차용의 결정 과정
IV .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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