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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賢惠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2
발행연도
2008.12
수록면
193 - 232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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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를 활용하여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六村이라는 정치체가 후대에 부회된 허구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체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육촌 허구설의 주요 근거는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성을 칭한 것도 6세기 이후이므로 六姓始祖설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六村의 존재가 새로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六村 전승과 六姓시조 설화는 성립시기와 성립 배경이 서로 다른 별개의 전승이다. 六姓 가문의 시조설화는 통일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六村 전승은 훨씬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건국신화 완성시 이전부터 전해오던 六村 전승에 六姓의 始祖 설화를 부회하여 두 갈래의 전승이 하나로 합쳐졌고 이 때 후대적 요소가 부가되었다.
육촌의 형성 배경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자료는 기원전 2세기 말이래 경상도 각지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목관묘, 목곽묘로 구성된 대규모 집단묘역이다. 이의 출현은 위만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정치, 문화적 파동의 여파로 유발된 연쇄적인 주민 이동의 결과물이며 새로운 정치체 형성을 반영하는 자료이다.
村과 部의 차이는 공간적인 확대나 양적인 확대만이 아니라 결속 관계의 질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통하는 동남 방면의 목관묘, 목곽묘자료 유적 중에서 초기 진지촌과 관련지울 수 있는 세력은 구정동 유적과 입실리유적 두 곳이다. 3세기 후반까지 이들을 중심으로 양적 확대 과정이 있었으며 3세기말~4세기 초반에 이르러 구정동 세력의 우세가 뚜렷해진다. 하지만 집단간의 결속 관계는 아직도 병렬적인 구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 고고학자료상으로 집단간의 결속 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분명해지는 것은 적석목곽분 단계이며 촌에서 부로의 전환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六村은 사로국을 구성한 6개 읍락에 해당하며 이러한 고고학자료의 검토를 통해 진한 소국을 구성한 읍락이라는 정치체의 등장시기, 배경, 그리고 공간적인 분포 상태 등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六村에 대한 이해의 방향
Ⅲ. 대규모 집단묘역의 형성
Ⅳ. 경주 일원의 목관묘ㆍ목곽묘 유적과 六村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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